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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바람을 보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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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바람은 서양에서 불어왔다. 서구식 근대화가 변화의 실체였다. 사이고의 초상화(그의 사진은 전해지지 않는다)를 보면 호방한 얼굴에 유달리 큰 눈이 두드러진다. 그 큰 눈으로 거세게 밀려오는 서양 문명의 힘을 보았고, 그 힘이 초래할 변화를 느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19세기 중반, 변화의 바람을 느낀 이가 사이고만은 아닐 터다. 그런데도 그의 인기가 특히 높다. 요즘도 그렇다. 역사인물 인기도에서 사카모토 료마(1835~1867)와 함께 1, 2위를 다툰다. 인기 있는 인물은 대개 메이지 유신 초기에 드라마처럼 살다간 이들이다.

인기 비결이 뭘까. “무사무욕(無私無欲)하고, 용감하며, 호탕했다고 봅니다.” 가고시마에서 만난 구로세 유지(가고시마국제대·경제사) 교수의 대답이다. ‘최후의 사무라이’ 모습을 사이고와 접목시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후쿠오카에서 만난 김봉진(기타큐슈대·국제관계학) 교수는 좀 다른 생각이었다. “개혁을 주창하다 비교적 일찍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메이지 유신이 침략주의 전쟁으로 이어질 때까지 오래오래 살았다면 평가가 다르거나 아예 주목을 덜 받거나 했을 거란 이야기다. 예컨대 이토 히로부미(1841~1909)처럼 평가 재료가 많아지면 아예 평가를 외면하거나 인기가 떨어지거나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 조선에서도 변화의 바람을 느낀 이가 적지 않았다. 개화파의 영수 박규수(1807~1876)를 비롯해 김윤식·어윤중에 이어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홍영식·서재필 등이다. 개혁의 방향은 옳았다. 설익은 변혁 시도가 문제였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개혁의 동력을 거의 상실했다. 『서유견문』을 쓴 유길준처럼 일본과 서구에서 유학을 한 인재들이 제대로 쓰이질 못했다. 서양에 유학한 일본의 개화파들이 근대적 제도 개혁에 속속 투입되었던 것과 대조된다.

그런 일본을 우리는 증오하면서 선망했다. 우리의 눈은 복합적이었다. 침략에는 저항했지만 그것을 가능케 한 근대화의 힘은 부러워한 것이다. 저항과 선망의 이중주, 그 밑에는 망국(亡國)의 한(恨)이 흐른다.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시점에 더 이상 망국의 한만을 곱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을 침략하는 제국주의를 거치지 않고도 우리는 근대화를 이뤄냈기 때문이다. 일본이 가지 못한 길이다. 지난 60여 년간 우리의 성취는 한국발 새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침략과 전쟁이 아닌 상생과 협력에 기반한 근대화의 새 바람을.

(가고시마에서) 배영대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