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선비'김구용 시인 1주기 서예전 거침없어라, 기품 서린 '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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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우리는 동양 정신을 말살하면서까지 감성적 유행에 경도하리만큼 부박(浮薄:천박하고 경솔함)하지 않다. (중략)우리는 끝까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투시할 줄 알아야 하며 순수한 정신의 원자(原子)를 추출 폭파해 인간의 무애자성(無碍自性:막히거나 거치는 것이 없는 인간의 본성)을 대오(大悟:크게 깨닫는 것)해야 할 임무에 있다."

지난해 12월 28일 타계한 김구용 시인(사진)이 1963년 쓴 글이다. 이어지는 이 글에서 그는 "신/인간 또는 긍정/부정 뿐만 아니라 정신/ 물질의 일체 양반(兩反)되는 차이와 상대성을 그대로 두고도 분별이 없어지는 날이 이 지구의 미래"라고 예견했다. 그러면서 김구용은 자신의 시와 글씨와 그림으로 그런 무애자성의 세계를 보여줬다. 김구용 1주기를 맞아 동료 문인·후학들이 '구용 선생 글씨전'을 마련, 서울 사간동 학고재에서 30일까지 전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구용이 생전에 동료들에게 거저 써준 글씨나 그림 80점이 전시되고 있다. 시·서·화에 거침없이 두루 능했던 김구용은 또 김동리 소설집 『무녀도』, 천상병 시집 『새』 등 문학 단행본 제자(題字)도 가장 많이 부탁받은 시인으로 기록된다.

전시장에선 '사전(辭典) 이전에서 돌은 먼동이 튼다'는 김구용의 짧은 시구가 유난히 눈길을 끈다. 어느 자(字)는 크고 굵게, 또 어느 자(字)는 작고 가늘게 쓴 글씨 자체에서 어떤 형식에도 구애됨 없는 무애를 느낄 수 있다. 해서 문학평론가 고(故) 김현은 "김구용의 모든 작품은 시간과 공간의 올 속에 끼인 표현될 수 없는 근원적인 경험을 언어로 표백하기 위한 오랜 노력의 결정"이라고 평했다.

그의 시 중 비교적 널리 알려진 '풍미(風味)'라는 작품의 전문을 옮겨보자. "나는 판단 이전에 앉는다./이리하여 돌(石)은 노래한다.//생기기 이전에서 시작하는 잎사귀는/끝난 곳에서 시작하는 엽서였다./대답은 반문하고/물음은 공간이니/말씀은 썩지 않는다.//낮과 밤의 대면은/거울로 들어간다./너는 내게로 들어온다.//희생자인 향불.//분명치 못한 정확과/정확한 막연을 아는가.//녹(綠)빛 도피는 아름답다./그대여 외롭거든/각기 인자하시라."

이 시는 처음부터 그리 쉽게 읽히지 않고 모래나 소금 씹은 것처럼 받아들이기 힘들다. 문맥도 논리도, 또 시의 자질인 서정도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구용 시는 소위 '난해시'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난해시'정도로 김구용 시를 소외시켰던 것은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에 압도된 우리 현대 시사(詩史)의 과오다. 서구의 합리주의에 밀려 진작 평단에서 배제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는 곱씹을수록 기품을 느낄 수 있다. 독자들을 판단 이전, 학습 이전, 역사 이전으로 앉게 해 각자에게 있는 마음·본성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일제 말기 10여년 간 절에 있으면서 동서양 고전을 두루 섭렵해 스님들에게 강의했던 김구용. 선(禪)적 직관으로 모든 것을 감싸안는 사랑,그리고 그 사랑마저도 초월하려했던 그의 시·서·화 세계를 재평가하기 위해 열린 이번 추모전은 그래서 의미를 더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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