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 정치와 무게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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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구에서 숫자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말할 나위도 없이 곤충이다. 그렇다면 무게로 가장 성공한 생물은 누구일까? 단연 식물이다. 이 세상 모든 동물들의 무게를 다 합쳐본들 식물들의 무게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식물과 곤충은 과연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뒀을까? 한마디로 '공생'의 지혜를 터득해 실천했기 때문이다. 땅에 뿌리를 박은 채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들을 위해 곤충은 꽃가루를 옮겨주고 식물은 그 대가로 곤충들에게 꿀을 제공했다. 서로 물고 뜯은 게 아니라 함께 손을 잡아 이뤄낸 성공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연이 그저 약육강식의 아수라장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 자연의 가장 막강한 두 생물군이 무차별적인 경쟁이 아니라 공생을 통해 성공을 이뤄냈다는 사실은 우리네 삶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네 삶에서 경쟁으로 친다면 운동경기를 빼놓고 대통령 선거 만한 게 또 있을까 싶다. 그 엄청난 경쟁에서 승리한 노무현 당선자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사실상 유권자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지지를 얻은 그의 앞길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비록 숫자로는 밀렸지만 무게로는 결코 밀리지 않을 국민의 절반을 너그럽게 끌어안을 공생의 정치만이 유일한 길임이 이 생물학자의 눈에는 너무나 또렷하게 보인다.

盧당선자는 민심을 읽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겉으로는 언론에 무작정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늘 나 같은 논객들의 쓴말에 귀를 기울이며 때로는 직접 e-메일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이번 선거도 그가 민심의 향방을 조금이나마 더 잘 읽었기 때문에 성공한 것이다. 당선이 되기까지는 민심을 살피는 것이 거의 전부일 수 있다. 그러나 이제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는 민심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잘 읽어낸 민심을 정책에 반영해 국민의 삶의 질이 향상되는 뚜렷한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절반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질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내가 관찰한 盧당선자는 또한 게임의 귀재다. 엎치락 뒤치락 마치 컴퓨터게임과도 같은 선거전에서 순간 순간 거의 투기에 가까운 승부수를 던지며 아슬아슬한 점수로 살아남아 다음 게임으로 넘어갈 자격을 얻었다. 내가 직접 통계를 내본 것은 아니지만 그가 얻은 상당수의 표가 게임세대의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즉흥적이고 순간적인 결정은 게임세대의 정서에 그대로 들어맞았지만 비게임세대에게는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세대간의 갈등은 단순히 연령의 차이만으로 일어난 것은 아닌 듯싶다.

이처럼 기대와 불안이 뒤섞여 있는 상황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길은 인재를 폭 넓고 고르게 등용하는 일이다. 공생의 정치란 한마디로 균형과 견제의 정치를 의미한다. 얼마나 훌륭한 참모들을 곁에 두느냐가 관건이다. 이제는 진중한 참모들과 함께 보다 차분한 게임을 했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게임이론에 가장 기본이 되는 '매-비둘기 게임'을 권한다. 미국 부시 행정부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늘 논쟁을 벌이며 정책을 결정한다. 세계 경제를 책임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닌 그린스펀 의장도 매파와 비둘기파로 갈린 참모들의 논쟁을 지켜보며 최종 결론을 내린다고 들었다.

선거과정에서 盧당선자는 경제발전 일변도보다는 분배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정부의 경제를 담당하는 여러 부서의 장들을 묶어 우리는 흔히 경제팀이라 부른다. 그러나 복지·환경·문화·교육·연구 등에는 그에 상응하는 팀이 없다.

나는 오래 전부터 '경제-개발' 부총리에 맞서 '복지-환경' 부총리를 세워 균형과 견제의 정부를 만들 것을 주장해왔다. 위상이 대등한 두 부총리를 중심으로 정부가 이를테면 매와 비둘기의 두 팀으로 나뉘면 그 큰 그림에 따라 부서들의 통폐합도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정파를 초월해 개발과 보전의 논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진정한 국민통합 참모진을 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되면 국무회의가 좀 시끄러워질 것이다. 하지만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토론을 즐긴다는 盧당선자에게는 더 어울리는 분위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한번 건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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