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강화 지침후 검찰수사 풍속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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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지난 10월 서울지검에서 수사관들의 구타로 피의자가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인권 강화 방침이 잇따라 발표된 뒤 피의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검사나 수사관은 오히려 주눅드는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서울지검의 한 검사는 "지난 19일 횡령 혐의로 긴급 체포한 피의자가 신문도 시작하기 전에 '협심증이 있다'며 진단서부터 내놓아 당황했다"고 말했다. 그 피의자는 이후 수사관이 조금만 큰소리를 치면 "응급약을 먹겠다. 물 좀 달라"며 "물을 갖다주지 않는 것도 가혹행위"라고 언성을 높였다고 이 검사는 전했다.

이달 초 배임 및 횡령 혐의로 구속된 한 피의자는 형사부의 조사 과정에서 "건강이 좋지 않다. 쉬었다 하자. 이렇게 무리하면 나 죽는다"며 "안정이 필요하니 의사와 딸을 불러달라"고 주문했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의 입김도 세지고 있다. 이전에는 검사실에 조심스럽게 연락해 "접견시간 좀 내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피의자를 만나러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하거나,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 "시간 없으니 빨리 피의자를 데려오라"고 큰소리를 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지난 23일 민주당 김방림 의원을 조사한 서울지검 특수부 수사진도 대질신문과 증거 문제 등을 둘러싸고 변호인과 입씨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 수사검사는 "구속 피의자에게 국선 변호인을 선임해준다는 형사소송법 개정안 발표 후 벌써 시행되는 줄로 잘못 알아 자세히 설명을 해주면 '나를 바보로 아느냐. 검사가 왜 법을 안 지키느냐'며 억지를 부린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자해 소동도 끊이지 않고 있다. 서울지검 마약수사부는 지난달 28일 대마초 흡연 및 소지 혐의로 체포한 피의자가 바닥에 머리를 찧는 등 난동을 부리더니 "수사관한테 얻어맞았다. 지검장 데려와라. 검사를 고발하겠다"고 소리쳐 곤욕을 치렀다. 검찰은 비디오로 李씨의 자해장면을 녹화, 공무집행방해죄를 추가해 기소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피의자의 인권은 보호돼야 하지만 수사관을 위협한다거나 난동을 부리는 것은 법의 권위를 부정하는 행위다. 법의 권위가 무너진다면 결국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정훈 기자

cc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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