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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86>제104화두더지人生...발굴40년:41.인수봉 사고 나던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유물(遺物)의 학술적인 가치를 확인하든 확인하지 못하든 무슨 차이가 있느냐, 어차피 백지 한장 정도의 차이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천만의 말씀이다.

시중에서 암암리에 거래되는 '근본 없는' 문화재들은 골동(骨董)의 가치는 있겠지만 학술적인 가치는 없다. 말하자면 유물 자체가 가지는 생명력이 전혀 없는 것들이다. 유물은 학술적인 발굴을 통해서만 일종의 족보를 갖게 되고 자료로서 가치를 얻는다.

암사동 발굴 기간 중인 1971년 11월 28일 일어난 인수봉 등반사고를 잊을 수 없다. 언뜻 발굴과 아무런 상관없는 일 같지만 뜻밖에 귀한 실마리를 제공하게 된다.

28일은 일요일이었다. 발굴조사가 막바지로 접어들어 조사를 통해 어렵사리 찾은 움집터와 출토유물들을 도면(圖面)에 옮겨 그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막판 사진 촬영을 위해 현장을 깨끗이 정리해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꺼림칙했던 것은 평면이 둥근 형태인 원형 움집터(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하나를 찾아 발굴조사는 완료했지만 기둥자리가 확인되지 않아 용도를 확정짓지 못한 점이었다. 집터인 것은 분명한데 무슨 특수 용도로 사용했던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작업공간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의심을 품은 채 다른 작업이 이어졌다.

인명을 앗아간 비극적인 등반사고는 오후 들어 갑자기 들이닥친 강추위 때문이었다. 오후 6시쯤 북한산 인수봉 정상에는 초속 15m 이상의 강풍이 몰아쳤고 수은주는 영하 10도 이하로 뚝 떨어졌다. 등산객들이 하산을 앞다투던 중 젊은 등반자 7명이 밧줄(자일)에 엉켜 암반 중간에 매달린 채 얼어죽은 사고가 발생했다. 인수봉 등반뿐 아니라 한국 암반 등반 사상 최악의 사고였다.

해발 8백3m인 북한산 인수봉쪽은 당시에도 서울 시민들의 대중적인 등산코스였고 특히 인수봉 바위 절벽은 암벽타기, 즉 록크라이밍 코스로 유명했다. 그런 곳에서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들을 섬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암사동 발굴현장의 기온도 영하 3도 이하로 떨어져 땅바닥이 얼어붙었다. 날씨가 춥다보니 자연 조사대원들은 작업을 중단하고 추위를 피해 닭장 방으로 모여 들었다. '며칠만 밀어붙이면 발굴 조사를 끝낼 수 있는데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며 불평들을 하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인수봉 사고 소식이 흘러 나왔다. 모두들 아연했다. 후속 보도를 기다리느라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샜다.

다음날 아침도 뉴스의 초점은 온통 인수봉에 쏠려 있었다. 조난 당해 밧줄에 매달려 있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과정이 중계됐다. 그러나 추위는 29일에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결국 최초 조난신고를 받고 20여 시간이 지나서야 밧줄에 얽혀 매달려 있던 시신들을 모두 끌어내릴 수 있었다. 당시의 뒤떨어진 구조 체제가 짐작된다.

갑작스런 한파로 인한 참사와 발굴이 어떻게 관련을 갖게 됐을까. 기둥자리를 찾을 수 없었던 원형 움집터를 포함한 작업 현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사고 다음날 노출시켜 두었던 움집 바닥이 얼마나 얼어붙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부를 시켜 한번 파보도록 했다.

순간 얼어붙은 두께 1cm 이상의 바닥이 마치 시루떡 한켜를 들어내듯 일어났다. 언 바닥을 모두 걷어냈더니 놀랍게도 그때까지 찾지 못했던 기둥 흔적들이 움집터의 벽면을 따라 나타났다. 완전한 형태의 빗살무늬토기 1점도 짓눌려 찌그러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실로 6천년 만에 햇빛을 본 것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땅이 얼지 않았다면 그대로 작업을 마무리지었을테고 그랬더라면 움집터는 기둥자리도 없고 빗살무늬토기도 나오지 않은 특수 용도 터로 보고서에 남았을지 모른다. 뜻밖에 날씨 덕을 봤고 한편으로 좀 더 치밀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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