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립스연구소 효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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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호 31면

내가 나고 자란 춘천은 1998년부터 생명산업(BT)에 눈을 뜬 곳이다. 춘천은 태생적으로 상수원 보호, 군사보호구역 등 각종 규제 때문에 지역경제 발전을 위한 운신의 폭이 좁다. 그래서 강원대는 몇 년 전부터 의생명과학의 꽃이라 할 수 있는 항체의학연구소를 설립하려 노력해왔다. 전원도시라는 특성상 굴뚝산업보다 항체 연구와 신약개발을 통해 ‘바이오 클러스터(cluster)’를 발전시키자는 취지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바이오 클러스터 중 하나는 ‘미국 샌디에이고 클러스터’다. 이곳에는 500개 넘는 생명과학 기업이 자리 잡고 있으며 수많은 노벨상 수상자가 배출됐다. 매년 투자되는 벤처자본이 13억 달러, 이미 등록된 과학 특허만 약 4000건에 달한다. 샌디에이고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곳이 스크립스연구소인데 이 연구소는 본원인 샌디에이고를 제외하고 두 곳에만 분원을 두고 있다. 바로 ‘스크립스플로리다’와 강원대 ‘스크립스코리아항체연구소(SKAI)’다.

강원대는 지난해 우여곡절 끝에 스크립스연구소를 유치했다. 강원도와 춘천시 등의 협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크립스플로리다는 3억 달러를 출연해 세계적인 클러스터 대열에 끼면서 엄청난 고부가가치를 생산하고 있다. 반면 우리 대학의 SKAI는 300억원을 유치해 연구 클러스터로 발돋움하고 있지만 재정이 빈약한 강원도에선 이마저도 쉬운 일이 아니다.

혹자는 내게 ‘왜 대학에서 연구소 유치를 해야 하느냐’고 질문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계화 플랜’을 강조한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세계적인 수준이 아니고선 협상테이블에 앉을 수 없을 만큼 글로벌 문화가 진전되고 있다. 많은 외국 연구진과 만나 보면 비록 강원대는 모를망정 ‘스크립스연구소를 유치한 대학’이라면 ‘아! 그러냐’고 반문한다. 한마디로 강원대를 보는 시선이 달라짐을 체험한다. 대학과 지역경제가 함께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세계 수준의 연구역량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실리콘밸리 신화의 중심에 스탠퍼드대와 UC버클리가 있는 게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우수 연구소와 우수 대학이 있는 지역엔 연관 기업들이 모여들어 고용 창출과 연구타운 조성이 가능해진다.

지금 우리의 최대 과제는 실력 있는 연구진을 확보하고 글로벌 연구개발(R&D) 네트워크를 구축해 경쟁력 있는 연구기관을 키워내는 일이다. 그래야만 국내 기업과 다국적기업의 콜을 받을 수 있는 산·학·연 합성 클러스터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지방도시가 세계 수준의 연구소를 유치하면 인재 유출 지역에서 인재 유입 지역으로 변신한다. 국제적 연구인프라가 조성되면 스필오버(spillover:넘침) 효과가 발생하고 국내외 고급 인력이 일자리를 찾아오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의 사기 진작에도 그만이다. 그런 사례를 우리는 샌디에이고 주변에 조성된 연구타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뿐 아니다. 세계적인 연구소를 유치할 때 그 대학은 세계무대로 뻗어가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맞이한다. 예컨대 스크립스연구소는 강원대 ‘의생명과학대학’의 교수진과 학생들의 수준을 크게 높여줄 것으로 기대되는데 이를 방증하듯 이미 여러 명의 월드 스타급 교수들이 강원대로 왔다. 세계적 혁신클러스터에 동참하는 대학들을 보면 세계 100위권에 드는 곳이 많다.

지방 국립대학을 지망한 젊은이들은 여러 방면에서 한국 사회로부터 불평등을 체험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런 학생들이 세계 최고의 레프런스그룹(준거집단)을 곁에 두고서 미래비전이나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가슴 설렐 일인가. 마이클 포터 교수의 “클러스터는 번영과 혁신의 동인”이라는 말을 새삼 떠올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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