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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발 못 쓰는 50대 15m 낭떠러지 레펠 “올빼미, 하강 준비 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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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9일 포항에 있는 해병1사단 유격훈련장에서 한 장애인이 밧줄을 타고 15m의 절벽을 내려오는 레펠을 하고 있다. 그 아래에 목발을 짚은 장애인 등 이 격려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격! 유격! 교육생 하가~앙 준비 끝.”

19일 오전 경북 포항에 있는 해병1사단 유격교육장. 목발을 짚은 채 20여m 계단을 올라선 송승민(57)씨가 낭떠러지 끝에 서서 뛰어내릴 준비를 하며 고함을 내질렀다. 공포가 가장 심한 높이로 알려진 15m 높이에서 밧줄을 타고 발로 벽을 차며 낭떠러지를 내려오는 레펠 훈련이다.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린 송씨. 왼발 소아마비로 지체장애 2급인 그는 군에 못 간 게 평생 한이었다. 오른발만으로 벽을 차며 내려오다 균형을 잃고 기우뚱하자 조교가 황급히 잡는다. 간신히 발이 땅에 닿는 순간 동료들의 환호와 박수가 쏟아진다. “와~. 해냈어. 아저씨 파이팅.”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가 해병대사령부에 의뢰해 18일부터 20일까지 실시한 ‘장애인 해병대 병영체험’. 142명의 장애인이 2박3일간 가족·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써내려 간 해병대 병영체험 극기훈련 일기는 땀과 악으로 채워졌다. 내무반 생활부터 유격훈련까지 일반인도 소화하기 힘든 과정을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넘었기 때문이다.

해상침투 훈련 코스에서 조교들이 “고무보트를 타기만 해도 통과시켜 주겠다”고 만류했는데도 이평래(62·지체장애 4급)씨는 “자식들에게 아빠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 보이고 싶다”며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모래사장을 달렸다. 이씨는 훈련을 마치자마자 땀을 뻘뻘 흘리며 드러누우며 “무거운 것을 들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있지만 내 인내력의 끝을 보고 싶어 오기로 버텨냈다”고 말했다.

미국 해병대의 볼로그 소령은 “비장애인도 힘든 해병대 극기훈련으로 장애인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다니…, 한국 사람들의 역발상이 놀랍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 부하들의 유격훈련을 지휘하던 중 레펠 코스 훈련 시간이 겹치는 동안 한국 장애인들의 극기훈련을 곁에서 지켜봤다.

병영체험에 참가한 장애인들은 자폐증의 정신지체 10대, 척추장애 60대, 안내견과 함께 참가한 시각장애 50대 등 나이와 장애의 종류가 다양했다. 부산국제장애인협의회 강충걸 사무총장은 “그동안 훈련이 어려울 것으로 판단돼 배제됐던 시각장애인 40여 명이 집단행동까지 하며 참가를 요구하는 바람에 규모가 지난 세 차례 때보다 두 배로 커졌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갖가지 사연을 갖고 있었다. 정신지체장애인 아들(15)을 데려온 박선희(43)씨는 “언젠가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남겨질 자식에게 홀로 서는 법, 위기대처 능력을 익혀주려고 참가시켰다”고 말했다.

20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신불수 상태인 송기만(62)씨는 “1970년대 해병대 출신인데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젊은 시절이 그리워서…”, 이평래(62·척추장애 5급)씨는 “방위 출신인데 그동안 인생에서 못 배운 게 있을 것 같아서…”, 안내견과 함께 참가한 목지은(53·시각장애인)씨는 “보이지 않는다고 못할 게 없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서…”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20일 오전 10시. 1사단 강당인 도솔관. 일반인도 힘들다는 해병대 체험을 소화해내고 수료증을 받아든 장애인과 가족·자원봉사자 392명은 함성을 지르며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2박3일간 이들과 함께한 해병대 자원봉사자 50명 가운데 한 사람인 김호성(20) 일병은 “장애를 무릅쓰고 무엇이든 악착같이 해내려고 달려들고, 또 결국은 해내고 마는 것을 보고 배운 게 많다. 남을 위한 봉사가 아니라 나를 위한 인생공부였다”고 말했다.

포항=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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