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2002'받은 편지함' 열어보니 …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2면

올해 e-메일로 전파된 인터넷 유머는 사회성을 띤 게 유난히 많았다. 지난 2월 동계올림픽 때 '오노 사건'으로 국민들이 분개하자 네티즌은 '오노하지마' '동성(김동성 선수)스럽다'란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유머는 월드컵 때 최고조에 달했다. 그림 파일·동영상 등 표현 방법도 다양해졌다. '작자 미상' '출처 불명'의 e-메일 월드컵 유머들을 모았다.

▶닭대가리가 골을 넣는다.

-닭벼슬 머리를 한 미국 선수가 한국전에 골 넣은 것을 패러디한 속담형 유머. '미국의 한 골은 이미 예견됐다'란 제목 아래 국어사전처럼 생긴 그림 파일이 읽는 사람의 배꼽을 뺐다. 뜻은 '의외의 인물이 어쩌다 좋은 결과를 얻는다'. 동의어로는 '삽질한다'가 있다고 한다.

▶상암 히씨 1대조 히딩크.

-한국 축구가 8강에 진출하자 히딩크 감독 귀화설이 인터넷에서 대두됐다. '히동구'란 이름의 주민등록증 그림 파일도 큰 인기를 끌었다.

▶포르투갈은 절대 우리를 못 이긴다. 우리나라는 11명 모두 축구선수지만 포르투갈엔 '피구'선수가 있다.

-한국의 예선 마지막 경기인 포르투갈 전을 앞두고 나왔다. 포르투갈 피구 선수의 이름을 패러디해 필승 의지를 다졌다. 비슷한 때 '2-8-1 시스템'이란 그림 파일도 화제가 됐다. 비기기만 해도 16강에 오르는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국 선수 11명 모두가 한국의 골대를 지키는 '필승 전법'이 소개됐다.

▶히딩크는 송종국(國)이란 나라의 설기현(일본의 자치단체 단위인 縣)에 산다. 설기현은 안정환(한약의 丸)과 윤정환이란 특산물로 유명하다. 히딩크의 집은 박지성이란 거대한 성(城)으로 유상철(鐵)이란 합금으로 만들어졌다 ….

-'네버 엔딩 스토리'처럼 한국 대표선수들의 이름이 줄줄이 이어진다. 뛰어난 조어법으로 연결했다.

정리=손민호 기자

하지만 e-메일은 단순히 소식만 전하지 않는다. 화선지에 먹물 번지듯 e-메일을 따라 퍼지는 인터넷 유머는 지친 일상에 신선한 자극제다. 누가 언제 만들었고 누가 왜 이렇게 퍼다 나르는지 사실 잘 모른다. 지난 6월의 월드컵 유머가 그랬다.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읽어보고 재미있으면 그만이다.

딴지일보 최내현 편집장은 "기존 매체에선 찾기 힘든 소재와 표현 방식이 인터넷에선 되레 자연스럽다"며 "올해는 단순한 유머를 넘어 네티즌 운동이 활발해진 것이 특징"이라고 진단했다.

올 한해 기자에게 배달된 e-메일을 다시 훑어봤다.

◇배칠수 파일=2∼3분 분량의 음성 파일이 첨부된 e-메일 하나가 올 해 장안을 웃음바다로 바꿔 놓았다.

"어이, 조지 부시. 나여. 자네가 팔것다고 한 그 F15인가 하는 자전거 있잖혀", "그러면 쪼까 곤란허지", "머여? 이 잡것이", "야, 이 ×××아".

이름하여 '배칠수의 잃어버려야 할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 인터넷방송 DJ 배칠수(32·본명 이형민)씨가 김대중 대통령의 목소리를 능청맞게 흉내낸 파일이다. F15 전투기 도입건을 패러디해 김대통령이 부시에게 갖은 욕설을 퍼붓는다는 내용이다. 이 파일은 약 1천만명이 받아본 것으로 알려졌다.

배씨는 "오노 사건 등으로 침체됐던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나라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에게 상스런 말을 해대는 것이 통렬함을 가져다 줬을 것"이라며 "인터넷이었기 때문에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시험문제 파동=최근 전파된 e-메일 중 최고의 사건인 '엽기 시험문제'. 문제의 '시험문제지'는 누군가 장난으로 만들어낸 것으로 보일만큼 황당했다.

'지금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는 수업의 이름은?(1번), 다음 중 라면 한개를 끓일 때 필요한 물의 양은?(13번), 세명이 치는 점 백원짜리 고스톱에서 20점으로 스리고에 피박에 광박에 흔들어서 났다면 총수익은?(23번)'

이 시험문제는 경북대학교 교양수업 '미술의 이해'의 실제 기말고사 문제였다. 인터넷에선 찬반 양론이 팽팽했다. 대학 시험이 장난이냐는 비난에 맞서 '참신하고 발랄하다'란 옹호도 있었다.

논란이 드세지자 강사 정효찬(32)씨가 정답과 해설을 일일이 붙인 문제풀이집이 e-메일로 다시 날아왔다. 정씨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기말고사로 총점의 20%를 반영할 생각이었다고 말했다. 이 수업의 전체 출석률은 90%를 넘는다. 그에게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문제를 냈냐고 물었다.

"학생 개인의 예술관을 밝히는 발표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의 발표는 감동적이었다. 한 조의 학생들은 코펠과 버너를 가져와 수업시간에 라면을 끓였다. 그리고 먹거리와 예술을 언급했다. 다른 조 학생들은 일일이 만든 화투를 펼쳐 보이며 생활 속의 예술을 얘기했다. 명색이 틀에 박히지 않은 상상력을 강조한 선생이 학생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다. 황당해 보이는 모든 문제들은 학생들의 발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다. 학생의 수업참여도도 측정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경솔했다."

◇삼베=올해 받은 e-메일 중엔 뜻깊은 것도 있었다. 삼베 달기 운동. 채팅 대화명 앞에 삼베 그림(▦)을 달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여중생들을 추모하자는 운동이었다. 처음엔 검은 리본(▶◀)을 달았다. 하지만 다음날 흰 리본(▷◁)으로 바꿨다. 상(喪)을 당하면 흰 옷을 입는 민족의 전통을 따르자는 취지에서였다.

다음날엔 리본 자체가 서양 문물이라며 아예 삼베를 달자고 했다. 맨처음 누가 이렇게 하자고 제안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흘동안 네티즌 수백만명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인터넷에서 서울 광화문 앞 촛불시위를 처음 제안했던 김기보(29)씨는 "이제 온라인 문화는 오프라인 문화에서 파생된 하급 문화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도 있는 대안 문화의 자리에까지 왔다"고 말했다.

◇스팸 메일=숫자만 따지자면 제일 많다. 아침마다 수두룩 쌓인 스팸(불량)메일을 지우는 일은 이제 일과다. 합법적인 광고 메일도 있지만 복제 CD나 성인 사이트를 홍보하는 불법 e-메일이 훨씬 많다. 정부가 단속에 나섰다지만 날마다 쌓이는 스팸 메일은 징그럽다.

제목만 보고 스팸 메일을 지우다 보니 시선을 붙잡으려는 별난 아이디어가 제목에 동원된다. '송년회 일정 확인 바랍니다'란 제목을 열어보니 반라(半裸)의 여성이 게슴츠레 웃고 있는 식이다.

누가 이런 걸 보낼까.답장을 보내는 사람은 있을까. e-메일로 불법 복제 CD를 파는 서울 용산상가의 손모(27)씨는 'e-메일 자동 검색 프로그램'으로 하루에 수만 통의 e-메일을 보내면 약 3%는 답을 보낸다고 말한다. 주문의 절반 가량이 게임 프로그램이고 성인 콘텐츠·윈도·MS 오피스 등이 잘 팔린다고 한다.

스팸 메일과의 싸움은 2003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까.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메일이 어떻게 사이버 공간을 가로질러 내 '편지함'으로 날아오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현대인에게 e-메일은 편지나 전화의 기능을 대신한지 오래다. 한국인의 52.3%가 인터넷에 접속하고 이 가운데 53.9%가 '받은 편지함'을 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한다(통계청·2001년).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