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개월 만에 … 대검에 봉인된 ‘노무현 판도라 상자’ 열리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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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12일 이인규 당시 대검 중앙수사부장이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검찰은 이때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증거자료는 공개하지 않았지만, 수사기록에 남겨 보존할 것이라고 밝혔다.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의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 고소·고발사건이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에 배당된 19일 대검찰청은 착잡한 분위기였다. 지난해 5월 노 전 대통령 서거의 충격으로 조직 전체가 위기 상황에 빠졌던 ‘트라우마(정신적 외상)’가 되살아난 데다 정치적 변수에 따라 이번 사건 수사가 어디까지, 어떻게 전개될지 가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검찰은 “통상의 사건 처리 방식대로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고소·고발인인 노무현재단과 노 전 대통령 유족을 불러 이들이 명예훼손에 해당한다고 지적한 부분을 듣겠다는 것이다. 검찰은 조 후보자를 상대로 당시 발언이 나오게 된 이유와 근거 등을 확인하는 수순도 밟을 방침이다.

문제는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존재하는지를 어떤 방법으로 확인할 것이냐다. 정치권 일각과 일부 시민단체 등은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의 기록과 계좌를 모두 다시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른바 ‘재수사’론이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 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검찰 관계자는 “수사 당시 ‘차명계좌라는 건 없었다’는 게 당시 수사팀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 기록을 다시 꺼내서 볼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중단했던 계좌 추적을 재개해 수상한 계좌가 있는지, 있다면 실소유주가 누구인지를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대검의 한 간부는 “당사자가 이미 사망해서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처리됐는데 보강수사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고소·고발사건 수사만 하면 된다. 정치적인 요구에 응할 이유가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지난해 노 전 대통령 관련 의혹을 조사했던 수사팀 관계자들을 상대로 “노 전 대통령 주변의 돈 흐름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차명계좌가 발견됐느냐”만 제한적으로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될 가능성이 있다. 아울러 수사팀의 진술을 뒷받침할 자료를 고소·고발사건 수사팀에 제출할 수도 있다.

◆청문회에서의 증언이 변수=검찰 안팎에서는 조 후보자 청문회를 주요 변수로 보고 있다. 대검 고위 관계자는 “청문회에서 ‘근거 없이 얘기한 것’으로 결론 나면 수사기록을 뒤져볼 필요도 없지만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발언이었다’는 쪽으로 기울면 어디까지 조사할지 다시 한번 판단을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검찰은 이미 조 후보자가 “주간지인가, 인터넷인가에서 본 것 같다”는 식의 해명을 내놓았기 때문에 청문회에서 이를 번복하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조 후보자의 발언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가 제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경찰 내부 정보나 첩보에 따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또 김태호 총리 후보자 인사청문회의 증인으로 채택된 이인규 전 대검 중수부장의 증언도 변수다. 여야가 이 전 중수부장을 증인으로 선정한 것은 김 후보자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수만 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에 관한 질문이 나올 경우 이 전 중수부장이 어떤 대답을 내놓을지 가늠하기 어렵다.

그는 본지와의 통화에서 “나는 거짓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그대로 말하겠다”며 여운을 남긴 바 있다. 결국 조 후보자와 이 전 부장 등의 청문회 발언 내용에 따라 검찰의 ‘제한적 확인’ 방침은 전면 재조사 등으로 확대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 셈이다.

전진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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