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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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 5월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 포퓰리스트인 르펜이 1차투표에서 2등을 하여 결선으로 올라갔을 때 파리시민은 대대적인 르펜 반대 데모를 벌였다. 파리시민들은 "파시스트보다는 악당이 낫다"는 구호를 내걸었다. 비록 시라크 대통령이 부패 혐의를 받고 있지만 부패한 후보가 파시스트보다는 훨씬 낫다는 호소였다. 우익 포퓰리즘인 파시즘에 혼이 난 프랑스 국민은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선거가 포퓰리즘적인 분위기로 흘러가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선거는 표가 결정한다. 누가 많은 표를 얻었느냐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기를 더 끈 사람이나 정당이 집권을 하고 정부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선거는, 아니, 민주주의라는 것은 언제나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과 함께 갈 수밖에 없는 숙명을 지닌다. 국민이 현재 바라고 원하는 것을 해주겠다는 포퓰리즘은 그렇기 때문에 어느 측면에서는 민주주의의 본질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숙한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나라에서는 포퓰리즘을 경계한다. 왜 그럴까.

이들은 표를 많이 얻은 정당이, 인기있는 정책이, 국민감정에 맞는 인물이 반드시 옳지는 않았다는 역사적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결정을 할 때 우리는 합리와 이성에만 의지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서는 감각과 감성에 더 귀를 기울인다. 파시즘은 투표로서 이룩된 것이다. 독일 국민이 자발적으로 선거를 통해 히틀러에게 권력을 준 것이다. 히틀러가 이용한 것은 독일인 마음에 깃들어 있는 반유대 감정이었다. 우파 포퓰리즘의 극치였다. 지금도 유럽의 극우정당들은 이민자들에 대한 박해와 추방, 반유대주의, 범죄에 대한 선동적 우려 등 유권자의 감성을 겨냥한 우파 포퓰리즘을 기반으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좌파 포퓰리즘은 중남미에서 역사적 실패를 했다. 노동 효율성을 고려치 않은 임금 인상, 재정을 무시한 복지정책, 구호로서의 반제국주의 등 유권자들의 감성을 자극해 좌파정권이 들어섰다. 그 결과가 바나나 리퍼블릭들이며 이러한 좌파 포퓰리즘은 지금도 중남미를 3류의 나라들로 머무르게 하고 있다. 우리는 민주화가 되면서 투표의 신화에 젖어 있다. 표를 많이 얻는 것이 최선인 '선거 지상주의'에 매달려 있다. 20, 30대가 전 유권자의 50%에 달하니 "그들의 감성을 겨냥하라"며 그들의 입맛에 맞는 감각적 선거운동이 최선인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아무리 유권자의 절반이 20, 30대라 할지라도 이 사회는 20, 30대만의 나라는 아닌 것이다. 세대 간 축적된 지혜와 경험이 반영된 선거여야만 제대로 된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젊은 세대의 변화욕구를 무시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변화의 욕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때 포퓰리즘의 토양이 생겨난다. 압사당한 여중생을 위한 촛불집회를 보라. 미국에 대한 우리 젊은이들의 마음은 이미 변해 있었다. 과거 같으면 그냥 넘어 갔을 일도 그들은 이제 지나치지 않는다.

그들의 자긍심이요 자신감이다. 단지 기성세대가 이를 감지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들의 분노로 인해 부시도 사과를 한 것이다. 그들의 변화의 욕구가 성취해 낸 일이다. 그러나 나라 간의 관계라는 것은 감정과 분노에 의해서만 좌우될 수 없는 다면적 요인을 지니고 있다. 이번 일도 한·미 간의 축적된 역사 속에서 바라봐야 한다. 대중운동은 이만하면 충분하다. 한·미의 관계를 포퓰리즘의 대상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나 젊은 표를 의식한 이 선거판에서 이러한 이성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 민주주의는 또 다른 고비에 접어들었다. 선거를 치를수록 포퓰리즘만이 판을 치는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이를 넘어 성숙한 민주사회로 나아갈 것인가의 기로에 서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성숙한 민주주의로 갈 수 있는가. 역사가 제시하는 길이 있다. 그것은 앞의 프랑스 국민들처럼 포퓰리즘에 휘둘리지 않는 성숙한 판단의식을 국민 각자가 갖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뢰할 수 있는 사회적 장치들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언론·법원·시장(市場) 등이 제 기능을 한다면 비록 선거가 포퓰리즘에 빠진다 해도 그 폐해를 막을 수 있다. 따라서 선거 결과보다는 민주적 장치들을 건강하게 가꾸는 것이 우리의 희망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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