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용-마에조노 K-리그서 붙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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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조노가 절 기억할까요. 벌써 몇년 전 일인데-."

물안개가 짙게 드리운 16일 경기도 구리 LG 축구장. 6년 전의 인연을 더듬어 옛 라이벌을 찾은 최성용(27·수원 삼성)은 별로 기대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예상은 틀렸다.

"아, 최상. 오히사시부리데쓰네(오랜만이네요)."

마에조노(30·안양 LG)가 단번에 최성용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최성용은 잠시 당황했지만 곧 "마에조노상, 오겡키데쓰카(안녕하십니까) "라며 화답했다. 이후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두 사람이 일본말로 하도 쏙닥쏙닥 얘기를 많이 해 인터뷰와 사진 촬영이 지체될 정도였다.

1996년 3월 애틀랜타올림픽 아시아 최종예선 결승전은 둘 모두에게 잊지 못할 무대였다. 최성용은 마에조노를 완벽하게 봉쇄해 일약 스타로 떠올랐고, 98년과 2002년 월드컵 멤버로도 뽑혔다. 마에조노는 "최성용이 나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녀 정말 싫었다"고 회고했다.

그 때 이후로 기량이 내리막길을 걷지 않았느냐고 묻자 마에조노는 "맞아, 맞아"라며 폭소를 터뜨렸다.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마에조노는 단정하지 못한 생활과 팀내 불화로 '천재성'을 잃어갔다. 브라질·포르투갈 등을 낭인처럼 떠돌다 한국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겠다는 각오로 지난달 안양 LG와 계약했다.

마에조노는 "팀 분위기가 좋고, 음식·잠자리에도 문제가 없다. 빠르고 몸싸움이 심한 한국 축구에 빨리 적응해 내년 개막전부터 팀에 도움이 되고 싶다"고 각오를 밝혔다.

최성용은 "마에조노는 뛰어난 선수라 잘 적응할 것으로 믿는다.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거친 상황도 피하려 하지 말고 과감하게 맞부딪치라고 조언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수원과 안양은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수도권 라이벌이다. 마에조노도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장에서는 둘이 충돌할 수도 있지만 경기가 끝나면 악수하고 헤어지는 게 프로 아니냐"고 했다. 최성용도 "내가 밀착마크해야 할 상황이 되면 96년 당시처럼 꼼짝 못하게 할 자신이 있다"며 "일본말로 욕하면 다 알아들으니까 포르투갈어로 욕하라"고 익살을 부렸다. 서로 미혼임을 확인한 뒤 마에조노는 "멋진 여자친구를 소개해 주고 싶다. 대신 내게는 맛있는 곳, 재미있는 곳을 소개해달라"고 말했다. 헤어질 때 둘은 서로의 전화번호를 휴대전화에 입력했다.

최성용은 "차로 한시간 거리밖에 안되니까 외로울 때면 연락하라"고 말했다. 최성용은 그의 눈빛에서 외로움을 읽은 것 같았다. 99년 혈혈단신 일본 J-리그(빗셀 고베)로 건너갔을 때 뼛속깊이 느꼈던 그 외로움을-.

◇96년에 무슨 일이=96년 3월 27일 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에서 애틀랜타올림픽 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결승전이 한·일전으로 벌어졌다. 한·일 양국은 이미 올림픽 출전권을 확보했으나 전통적인 라이벌 의식 때문에 절대 질 수 없는 한 판이었다.

한국의 비쇼베츠 감독은 준결승에서 두 골을 넣으며 절정의 컨디션을 보이고 있던 마에조노를 봉쇄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고 판단, 최성용에게 전담 마크 명령을 내렸다. 90분 내내 마에조노를 끈질기게 따라붙은 최성용 덕분에 한국은 경기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한국은 후반 34분 이상헌의 헤딩골로 앞서갔지만 불과 1분 뒤 조 쇼지에게 그림같은 오버헤드킥 동점골을 허용했다.

한국은 동점이 된 지 2분 만에 얻은 페널티킥을 최용수가 차넣어 결국 2-1로 승리했다.

구리=정영재 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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