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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77>제104話 두더지 人生...발굴 40년: 32 아수라장된 발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무덤의 주인공이 백제 25대 무령왕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당장 내부를 공개하라는 보도진의 독촉도 빗발쳤다.

주인공을 정확히 알 수 있는 고대 임금의 무덤이 발견됐다는 사실도 센세이셔널한 토픽감인데다 도굴(盜掘) 당하지 않고 온전한, 소위 '처녀분(處女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발굴현장은 지금 생각하면 뭔가에 홀린듯 거대한 힘의 치마폭에 휩싸이는 분위기로 변해갔다.

발굴단장인 김원룡 국립박물관장은 무덤내부를 공개할 것인지, 하지 않을 것인지 신속하게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김단장은 대원들과 구수회의조차 하지 않고 언론에 먼저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보도진에게 먼저 왕릉 내부를 공개하는 것은 고고학 발굴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됐다.

언론 공개 전 나는 대원들과 함께 무덤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무령왕의 유택(幽宅)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정말이지 숨이 막혀오는 기분이었다. 무령왕이 서거하고 실로 1천4백50여년 만의 첫 대면 아닌가. 당장이라도 "네 이놈, 고이 잠든 나를 왜 깨웠느냐"는 무령왕의 불호령이 떨어지기라도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움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내부를 둘러봤다. 널(棺)을 운반해서 무덤방(石室)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널길, 즉 연도 입구에는 자기(磁器)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동전(銅錢) 꾸러미가 놓여 있는 두장의 석판(石板)이 바로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운운 새겨져 있는 묘지석(墓誌石)이었다.

석판 바로 뒤 연도의 중앙에는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머리에 닭벼슬 같은 철제품을 꽂은 채 침입자를 응징하려는 듯한 자세의, 당시까지 전혀 보지 못했던 돌짐승(石獸)이 네발로 버티고 서 있었다. 연도가 끝나고 관이 안치돼 있는 무덤방인 벽돌방(塼室)으로 이어지는 입구는 벽과 천장에서 가늘고 굵은 나무뿌리들이 장막처럼 뻗어내려 있었다.

마치 영화 속 드라큐라가 살고 있는 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벽돌방 내부에는 폭삭 삭아 버린 관재(棺材)들이 관이 올려져 있던 관대(棺臺)를 무질서하게 덮고 있었다. 연도와 벽돌방 곳곳에 흩어져 있는 각종 부장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무령왕과 첫 대면한 순간의 기억들이다.

무덤 내부를 천천히 둘러 볼 여유도 없이 김단장은 언론 공개를 결정했다. 그러자 이제는 보도진들 간에 서로 먼저 취재하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잠시 의논한 끝에 실내 촬영준비가 돼 있는 공영방송 KBS부터 내부를 촬영하도록 했다. 단 실내에서 촬영할 기자재가 준비되지 않은 타 언론사의 카메라 기자들을 위해 방송 촬영용 라이트를 비춰 준다는 조건이었다.

나와 조사원들은 사진기자들의 요란스러운 촬영 과정을 멍하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이호관(李浩官) 학예연구관이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기자들을 교통정리해 질서 있게 촬영을 끝내도록 안간힘을 썼다.

아수라장 같은 일련의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구경꾼들 사이에서는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무덤 문을 열자 바깥 공기가 들어가 왕릉에 묻힌 유물이 순식간에 썩고 관이 내려 앉았다''무덤을 열자 무령왕의 혼이 하얀 연기로 변해 사라졌다''무덤 입구를 파헤치자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등등. 어떻게 그런 엉뚱한 유언비어가 난무하는지 이해가 안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시간은 흘러 보도진의 왕릉 내부 촬영이 끝나고 발굴단은 야간작업에 들어갔다. 발굴대원들은 그저 김단장의 지시대로 움직일 뿐이었다. 발굴현장의 모든 결정은 발굴단장의 권한이고 임무였다. 게다가 조사에 참여한 손병헌·지건길과 나는 김단장의 제자였으니 무슨 대꾸를 할 수 있었겠는가.

스승 앞에서 감히 발굴조사에 대한 의견을 말할 수 없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 발굴 현장의 경직된 분위기는 요즘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김단장은 김영배 공주박물관장과 의논했겠지만 아무튼 야간작업을 해서라도 발굴조사를 끝내야 한다고 결정했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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