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관리'로 국방개념 바꾸는 독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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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군대의 기본임무는 국토방위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나라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군의 존재 이유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는 불변의 대명제다.

물론 자기나라 뿐 아니라 전세계를 테러로부터 지키겠다며 외국에까지 군대를 보내는 미국 같은 나라도 있다. 그러나 오지랖 넓어 보이는 미국의 이러한 국제적 개입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자국, 혹은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뿐이다.

독일이라고 다를 게 없다. 독일 기본법(헌법) 87조 a항은 "연방 정부는 국토방위를 위해 군대를 편성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연방군의 일차적 임무가 국토방위란 사실을 헌법에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게 곧 바뀌게 생겼다. 페터 슈트루크 독일 국방장관은 지난 5일 독일군의 일차적 임무를 '국토방위'에서 '위기관리'로 바꾸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단순히 국경선을 지키는 것이 국방인 시대는 지났다고 주장했다. '국경선 너머 훨씬 먼 어느 곳, 예컨대 힌두쿠시 산맥(아프가니스탄)'부터 방어하는 것으로 국방의 의미가 변화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독일이 아프가니스탄에 군대를 보낸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론 독일이 '뱁새가 황새 따라 가듯' 미국을 흉내 내겠다는 뜻은 아니다. 슈트루크 장관은 독일군을 더욱 소수 정예화, 기동화 하고 가능한 국방예산은 줄이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면서 이같은 방침을 밝혔다.

고전적 개념의 국경선을 지키는 것은 이제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투의 그의 발언은 분명 매우 '튀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좌파정권 국방장관다운 발언이라고 애써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현재 독일 국내외 정세를 감안하면 그의 발언에 수긍이 가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소련 땅이었던 나라들까지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이 되는 마당에 '주적(主敵)' 개념을 바꾸는 게 사리에 맞는 면도 있다.

슈트루크 장관의 발언은 분단국 출신 기자에게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다. 분단된 독일 땅에서 소련군 36만명, 미군 25만명이 가공할 화력으로 맞서던 게 불과 십여년 전 일이기 때문이다. 휴전선에서 아직도 1백만명 이상의 병력이 총부리를 맞대고 있는 우리는 언제 이런 '여유'를 부려볼 수 있을까.

jsy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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