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말·글말 가려씁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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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구차한 말살림 글살림 근근이 해온 처지여서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형편이 늘 못 되었다. 내 코가 석자인데 싶어서, "어떻게 쓰면 좋아요""문학의 미래는 어떤가요"이런 질문 더러 받아도 모른다, 모른다 하면서 '낮은 포복'으로 기어왔다. 그런데 말할 '군번'이 되었단다.

무슨 무슨 상 시상식장이나 기념식장 갈 때마다 경험한다. 이런 예식에서 축사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적다. 축사는 지위 높은 사람에게 차례가 가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자리에 독창적인 인간이 앉을 확률은 매우 낮다. 높은 사람들에게 미안하지만 이건 '피터의 법칙'이라는 것이지 내 말이 아니다. 그래서 독창적인 축사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하나마나, 들으나마나다. 문제는 시상식일 경우, 수상자의 수상 소감이다. 담담하게 소감을 말하면 좋을 텐데 대개는 저고리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 꺼내어 읽는다. 자신의 발언이 공식화하는 것을 의식하거나, 어디엔가 게재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말하는 것과 글 읽는 것이 달라서 그럴 테지만 그런 수상소감은 아무 울림도 지어내지 못한다. 어째서? 관념어로 꽉 짜인, 줄줄이 복문장(複文章)이다. 듣기에 너무 어려운 그 소감은 '읽는 말''눈의 말' 글말이다. 하객이 기다리는 것은 '듣는 말''귀의 말' 입말이다. 그러니까 수상자는 귀의 말인 입말을 기다리던 청중에게 눈의 말인 글말을 들려주고는 총총히 연단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기본기가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바로 발화(發話) 상황에 대한 정교한 대응 감각인데 그게 없다.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쓰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나는"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싶은 대로 쓰면 초단은 될 거예요"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지 않아 초보자의 입단은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왜 못할까? 유식해 보이고 싶어서 폼나는 어휘를 고르다가,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말장난하다가 글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생각의 끈을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오르는 글들이 우리 말을 파괴한다고 걱정들이 태산이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엄숙주의의 굴레를 벗고 청산유수로 글을 토해낸다. 정말 잘 읽힌다. 화가가 쓴 글, 가수가 쓴 글이 인문학자가 쓴 글보다 훨씬 부드럽고 정교한 경우를 자주 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나는 문어(文語)가 구어화(口語化)하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은 e-메일을 쓴다는 기분으로 쓰지 않고 말한다는 기분으로 쓴다. 그래서 쓴다는 강박관념, 곧 생각의 흘게가 풀리면서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같다.

우리 말은, 우리 문학은 그쪽으로 가파르게 기울고 있는 것 같다. 김화영 교수가 쓴,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의 짧은 글들을 기억하시는지. 이 근엄한 문학평론가가 쓴, 내가 소설에다 실험하고 싶어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기억하시는지.

"야, 요거 참 삼삼한 시네. 그런데 왜 삼삼하냐고 누가 물으면 뺨 맞은 듯 깜빡, 몰라져 버리네."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야, 단수 한번 높구나."

"그러니까 무슨 분위기 좋은 찻집 같은 데 남녀가 서로 마주보고 앉아 있단 말이지…농담 따먹기만 하고 있단 말이지…그만 앞에 놓인 찻잔을 엎질렀단 말이지…그런데 정작 쏟아진 것은 이쪽 마음이다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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