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75>제104話 두더지 人生...발굴40년:30 입구 드러낸 무령왕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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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윤홍로(尹洪) 기사로부터 상황을 보고받은 당시 허련(許鍊) 문화재관리국장은 다음날 아침 장관 주재 회의에서 윤주영(尹胄榮) 문화공보부(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공주의 상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회의 참가자들은 김원룡(金元龍)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고 문화재관리국 직원들로 이뤄진 발굴단을 즉시 현장으로 파견하도록 결정했다.

같은 시각 현장의 상황은 어지러웠다. 공주박물관 김영배 관장을 중심으로 한 공주지역 학자들은 발굴 작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야단들이었고 심지어 발굴조사를 일시 중지시킨 윤기사에게 심한 욕설을 퍼붓기까지 했다. 윤기사는 뚝심으로 버텼다. 발굴조사 단원들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현장 상황이 보고된 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조사단원들이 공주에 도착했다. 자초지종을 몰랐던 나는 현장에 도착해서야 전후 사정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사정을 알기 전 7월 7일 오후 현장에 도착한 나는 안면 있는 서울의 일간지 기자들이 내려와 있는 것을 보고 의아했다.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으로 미루어 '뭔가 큰일이 있는 모양이구나'하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김원룡 단장은 기자들과 구경꾼들은 아랑곳 않고 그동안의 작업 진행사항을 보고받은 후 오후 4시부터 다시 무덤의 입구에 해당되는 곳을 파 내려가도록 지시했다.

아치형 무덤입구를 벽돌(塼)로 쌓아 완전히 막아 놓은 상태를 확인할 무렵 날이 저물었다. 결국 입구의 바닥까지 파 내려가지 못하고 작업은 일단락됐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김단장은 무령왕릉이 송산리 고분군 가운데 과거 도굴됐다가 다시 묻힌 폐(廢)고분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때문에 시간과 경비를 절약하기 위해 야간작업을 결정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해가 지자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러다 보니 무덤입구를 노출시키기 위해 파 놓은 '발굴 구덩이'가 잘못하면 '빗물 구덩이'로 변할 판이었다. 임시 방편으로 물길을 돌려 무덤 속으로 빗물이 흘러들지 않도록 긴급조치를 해놓는 것으로 작업을 마쳤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고 시간은 자정 쯤이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도굴에 대비해 공주경찰서에 경비를 의뢰한 후 발굴단은 숙소로 철수했다.

7월 8일. 전날 밤부터 내린 비는 새벽이 돼서야 멈추기 시작했다. 발굴작업은 평소보다 한시간 빠른 오전 8시에 시작했다. 무덤을 만들 때 입구 앞에 석회를 섞어 다지면서 메웠던 흙이 무척 단단해서 파내는 데 많은 시간이 들었다. 오후 3시쯤 무덤입구인 아치의 바닥까지 파내려가는 데 성공했다.

무덤 입구가 완전히 노출되자 자연 사람들의 관심은 무덤 안에 과연 무엇이 묻혀 있고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하는 데로 쏠렸다. 발굴단은 물론이고 모여 있는 구경꾼들의 심정도 마찬가지였다. 팽팽한 긴장이 흘렀다. 늦었지만 무덤 입구를 쌓아 막은 벽돌을 들어내기 전 위령제(慰靈祭)부터 지내기로 했다. 급히 사람을 보내 수박과 북어, 막걸리 등 제물(祭物)을 준비했다. 위령제는 죽어 묻혀 있는 주인공을 위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예의다.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사실 위령제는 첫 삽을 뜨기 전 지내는 것이 관행이었다. 유택(幽宅)을 헐게 된 것에 대해 용서를 빌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안전을 비는 제사를 발굴 중간에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 무령왕릉에서는 무덤 입구까지 파놓은 후 지내게 됐으니 순서가 뒤바뀌어도 한참 뒤바뀌게 됐다. 그만큼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위령제를 마친 후 드디어 김단장이 벽돌로 막아놓은 입구 앞에 섰다. 수백, 수천의 눈동자들이 김단장의 일거수 일투족에 쏠렸다. 마침내 김단장은 입구를 막은 맨 위의 벽돌 한장을 뜯어냈다. 백제 무령왕이 우리 눈앞에 환생해 나타나는 순간이었다.

생각할수록 오묘한 일이다. 배수로 공사에 나선 인부의 우연한 삽질이 아니었다면, 배수로가 지나는 위치가 30㎝만 6호분 봉분 쪽으로 설계됐더라면 백제 무령왕의 무덤은 우리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도 무령왕릉의 존재를 알지 못하고, 무령왕릉은 영원한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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