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에 메아리친 '여중생 사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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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유엔 무용론'까지 터져나오는 형편이지만 핍박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유엔이 갖는 의미는 여전히 각별하다.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 범국민 대책위원회(범대위)' 소속 방미 투쟁단이 미국 내 첫 방문지로 뉴욕 유엔본부를 택한 것도 '유엔은 약자 편'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명의 범대위 대표들은 3일 낮(현지시간) 미국의 인권·반전단체인 국제행동센터(IAC) 관계자들과 함께 유엔본부 앞에 나타났다. 매서운 바람 탓에 체감 온도가 영하 15도까지 내려갔지만 대표들은 시린 손을 입김으로 녹이며 부지런히 행인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줬다. '미군은 가라' 등의 구호가 적힌 종이판과 사건현장 사진을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민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시위 직후 유엔 처치센터에 마련된 기자회견장의 분위기도 날씨만큼이나 냉랭했다. 우선 참석한 기자들이 너무 적었다. CNN·폭스뉴스·로이터 통신 등 몇몇 유력 언론사 소속 기자들이 참석했지만 표정은 뜨악했다. 대표단의 말을 제대로 받아적는 기자도 드물었다.

우리 측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주한 미군이 한국에 머물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하는 대목에선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도 보였다.

무거운 분위기가 반전된 것은 이날 오후 맨해튼 IAC 본부에서 열린 '국제연대를 위한 비정부기구(NGO)포럼'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1백여명의 NGO들은 투쟁단에게서 여중생 사망 사건의 진상을 전해듣곤 "충격을 받았다" "미국인으로서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NGO들은 범대위 지원을 위해 자료를 요청하기도 했고, 즉석에서 성금을 쾌척하기도 했다. 이 열기는 곧바로 한·미 인권단체의 연대로 이어졌다.

이 자리에서 NGO들과의 협의를 마친 한상열 범대위 공동의장은 "미국 내 주요 지역별로 상설 한·미 연대기구를 설치해 여중생 사망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키로 했다"고 밝혔다. 여중생 사망 사건을 위한 양국 간 첫 고리가 마련된 셈이다.

시작은 미약하다. 그러나 분명 불씨는 지펴졌다. 일부 미국인의 편견과 독선을 녹일 큰 불길로, 이 불씨를 키우는 일은 이제 우리 국민 모두의 몫으로 남게 됐다.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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