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겨울잠 깬 '북극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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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러시아가 남자테니스 국가대항전인 데이비스컵 1백2년 역사상 처음으로 은빛 찬란한 우승컵을 안았다.

러시아는 2일 새벽(한국시간) 프랑스 파리 베르시 실내코트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월드그룹 결승전(4단·1복식) 마지막날 단식 두 경기를 모두 승리, 종합전적 3승2패로 우승했다.

러시아의 우승은 1962년 소련 시절 첫 출전한 이후 처음이다.

러시아는 이번 우승으로 대회 최다 우승국 미국(31회)과 호주(26회), 프랑스·영국(이상 9회) 등에 이어 데이비스컵의 11번째 수상국으로 기록됐다.

러시아는 첫날 단식에서 1승1패를 기록하고 둘째날 복식에서 패해 1승2패로 궁지에 몰렸다.

그러나 최종일 '에이스' 마라트 사핀(세계랭킹 3위)이 세바스티앙 그로장(17위)을 3-0으로 꺾어 2승2패의 균형을 이룬 뒤 마지막 단식에서 스무살 신예 미하엘 유즈니(32위)가 폴 앙리 마튜(36위)를 맞아 4시간17분 간의 대접전 끝에 3-2로 역전승을 거둬 우승컵을 따냈다. 유즈니는 홈코트의 마튜에게 먼저 두 세트를 내줬으나 침착한 플레이로 대역전승을 일궈냈다.

역대 데이비스컵 결승에서 1승2패로 뒤졌던 팀이 역전승하기는 38년 만에 처음이다.

우승의 주인공이 된 유즈니의 등장에는 러시아 테니스팀의 맏형 예브게니 카펠니코프(28, 27위)의 '희생'이 있었다. 유즈니가 베리시 코트의 붉은빛 흙먼지 속에서 격정적인 몸짓으로 우승의 감격을 만끽하고 있을 때 카펠니코프는 벤치에서 조용히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메이저 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96년 프랑스오픈, 99년 호주오픈)하는 등 90년대 러시아 테니스의 전성기를 불러 왔던 카펠니코프는 마지막날 출전을 자진 포기하고 벤치를 지켰다.

전성기 때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체력 덕분에 '디젤엔진'으로 불렸던 그도 나이가 들고 부상이 겹치자 예년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첫날 단식, 둘째날 복식에서 패했던 것도 그의 잦은 실수 탓이었다. 최종일 경기를 앞두고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감독에게 그는 자기 대신 젊은 유망주를 추천했다.

카펠니코프는 인터뷰에서 "자아(自我)는 '내가 나서야 한다'고 부추겼으나 그것은 욕심이었을 뿐이다. 나는 자아를 차가운 시베리아로 귀양보냈다. 벤치에 앉아 지켜만 보는 것은 쓰라렸으나 팀을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자신을 낮췄다.

한편 데이비스컵 대회는 1900년 미국 하버드대 졸업생 드와이트 데이비스의 제안으로 1회 대회가 열린 이후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을 제외하고 매년 개최돼 올해로 93회째를 맞았다. 데이비스가 기증한 실버컵은 그의 이름을 따 데이비스컵으로 불린다.

김종문 기자

j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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