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뺑소니잖아" "협박했잖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11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무성의하게 대응하지 마라. 재난은 아차 싶은 순간에 온다. '체인징 레인스'는 사소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성의 있게 다듬어 비교적 짜임새 있게 발전시키는, 할리우드의 오랜 장기가 발휘된 영화다. 로맨틱 코미디의 수작 중 하나로 꼽히는 '노팅 힐'을 만든 로저 미첼 감독의 연출과 두 배우의 연기가 꽤나 안정된 편이다.

제목(Changing Lanes)이 알려주듯 사건의 발단은 차로 변경이다. 잘 나가는 변호사 게빈(벤 애플렉)과 가난한 보험외판원 도일(새뮤얼 잭슨)은 서로 다른 목적으로 법원에 가던 중 사고를 낸다. 게빈의 차가 끼어들기를 시도하다 도일의 차를 받은 것. 게빈은 회사의 운명이 걸려 있는 중요한 서류를 법정에 제출해야 했고, 도일은 두 아들의 양육권을 지켜야 하는 판국이었다.

그러나 게빈이 도일의 급한 사정을 나몰라라 내빼면서 두 남자의 관계는 엉키기 시작한다. 게빈은 서류를 도일의 차에 두고 오는 실수를 범한다. 사고 탓에 20분 지각해 양육권을 빼앗긴 도일은 협박자로 변하고, 이에 질세라 게빈도 반격을 개시한다. 하루라는 짧은 시간 동안 '자식'과 '커리어'라는, 남자의 자존심상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의 모습은 교차 편집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 이들은 자신의 오류를 깨닫는다. 게빈은 목적 달성을 위해 부정도 서슴지 않는 변호사 집단에 대한 염증을 폭발시키고, 도일은 알콜 중독과 의지 박약으로 가정을 돌보지 않았던 스스로를 반성한다. 요컨대 영화는 외곬으로 질주하는 현대인들에게 잠시 멈춰 생각해볼 기회를 가지라고 타이른다.

이 영화가 갖는 드라마적 안정감은 장점인 동시에 할리우드 영화가 늘 지적당하면서도 되풀이하는 한계이기도 하다.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착한 소시민이 되겠다고 다짐하거나, 절대로 소시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면서 교과서적 가치를 강조하는 따위 말이다. 그래서인지 아무 부족할 것 없는 여피 변호사가 굳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면서 정의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이 살 집을 물색하며 좋은 아빠가 되겠다고 결심하는 보험외판원 쪽이 훨씬 피부에 와닿는다.

이렇게 불만을 갖다 보면 좀더 다른 전개가 가능했을 법하다는 욕심도 생긴다. 가령 차로 변경으로 인한 승강이를 바늘로 어디 한 군데 콕 찌르면 금방 터져버릴 것 같은 현대인의 스트레스성 일상에 대입했다면 어땠을까. 자신이 늘 무시당하고 억눌린다고 느끼던 흑인 도일이 내성적인 보험외판원에서 집요하고 치밀하게 복수를 실행해가는 사이코 킬러로 변했다면 차라리 영화적 신선함은 더하지 않았을까. 토니 콜레트·시드니 폴락 출연. 29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