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英, 국제회의서 "佛語 쓰자" 해프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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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미국과 영국이 국제회의에서 나라이름 표기를 프랑스어로 하자고 주장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지난주 체코 프라하에서 열린 유럽대서양동맹위원회(EAPC) 정상회의에서다.

문제는 레오니트 쿠츠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회의 참석을 고집하면서 비롯됐다. EAPC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19개 회원국과 기타 유럽국가, 우크라이나·타지키스탄 등 동구·중앙아시아권 27개국의 군사협력관계 강화를 위해 1997년 결성된 기구. 쿠츠마 대통령이 당연히 참석할 자격이 있는 회의다.

하지만 그가 2년 전 이라크에 첨단 방공 레이더 판매를 약속한 뒤 사이가 껄끄러워진 미국과 영국이 우크라이나의 참석을 반대했다. 그럼에도 쿠츠마 대통령은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로 날아와 우크라이나의 회담 좌석을 요구했다.

국명의 알파벳 순으로 자리를 배치하는 나토의 규칙상 영국(UK)의 토니 블레어 총리와 미국(US)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보기 싫은' 우크라이나의 쿠츠마 대통령과 나란히 앉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 것이다. 고육책으로 두 영어권 국가의 외교관들은 국가명을 프랑스어로 표기하도록 바꿔버렸다.

결과적으로 미국(Etats-Unis)은 보다 우호적인 에스토니아의 옆자리가 됐고, 영국(Royaume-Uni)은 나토의 새내기가 될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 사이에 앉게 됐다. 불청객 쿠츠마 대통령이 터키 다음의 맨 마지막 자리로 밀려났음은 물론이다.

이 같은 해프닝은 대(對)테러 첨병을 자임하고 나선 나토의 동진(東進)정책과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관계강화 노력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임을 드러내는 예 중 하나에 불과하다. 앞서 EAPC 회의에 참석하려던 카자흐스탄 국방장관이 탄 비행기가 체코 영공통과 허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토 전투기에 의해 강제착륙되기도 했다. 벨로루시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은 체코 당국이 벨로루시의 인권상황을 문제삼아 입국비자를 발급하지 않아 회의 참석이 좌절됐다.

조지 로버트슨 나토 사무총장은 기자회견장에서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이 던진 토마토 세례를 받을 뻔하기도 했다. 동구권 국가들의 나토 가입을 마지못해 받아들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뒤에서 미소를 지었을지 모를 일이다.

cielble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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