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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쯔양은 누구] 개혁·개방 실무 총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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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1989년 5월 19일 새벽. 중국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자오쯔양 당시 당 총서기가 나타났다. 그는 한 달여의 민주화 시위로 지친 학생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너무 늦게 왔다. 미안하다. 여러분이 제기한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될 것이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자오는 공식 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강경파의 무력 진압 주장에 밀려 실각한 것이다. 덩샤오핑은 마지막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자오를 숙청해 버렸다. 이후 자오는 가택에 연금됐다.

97년 2월 덩의 장례, 7월 홍콩 반환식에 참석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거부됐다. 간간이 지방 여행은 허용됐지만 사망할 때까지 16년간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생활을 해왔다.

그는 19년 허난(河南)성 화(滑)현 부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13세 때인 32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87년 총서기에 오를 때까지 순풍 가도를 달렸다. 67년 문화혁명 때 숙청됐다가 71년 복권된 게 유일한 굴곡이다. 덩이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면, 자오는 이를 수행하는 개혁개방의 실무총책으로 불렸다. 식량난이 한창이던 70년대 말 "수수를 먹으려면 자오쯔양에게 가라"는 말이 유행했다. 그는 생산성 개념을 중국 경제에 앞장서 접목시킨 지도자였다. 쓰촨(四川)성에선 생산물의 일부 사유화를 인정하는 농업생산 청부제를 도입해 생산성을 파격적으로 높였다.

미니버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현지를 시찰하는 추진력으로 개혁을 독려했다. 쓰촨성의 성과로 그는 단시일 내 중앙 정계로 진출했다. 중앙무대에서 자오는 인민복 대신 양복을 애용하며 외자 유치에 나섰다. '중국의 사업가'라는 애칭이 붙었다. 그는 '죽(竹)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국의 정치 현장을 국제무대에 개방하는 데도 열심이었다. 총서기였던 87년 10월 서방 기자단을 중국의 정치 일번지 중난하이(中南海)로 초청했다.골프를 좋아해 베이징 차오양(朝陽)공원 골프장의 명예회원 1호에 오르기도 했다. 99년 80회 생일엔 그를 칭송하는 글이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많이 올랐다. 그동안 연금 해제를 촉구하는 서한이 100만통이 넘었고, 98년에는 홍콩 인권단체에 의해 노벨 평화상 후보로 천거되기도 했다.

유상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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