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맞는 狂氣배역 이 맛에 배우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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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건은 보면 볼수록 좋은 배우다. 장동건과 영화 찍는 기분이 어떠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그는 스타니까, 난 아직도 볼 때마다 떨린다(웃음). 차마 사인 좀 해달라고는 말 못했다. 한 여자가 데리고 살기엔 너무 매력적인 남자다."(김기덕 감독)

"촬영 현장에서 느껴지는 배우들의 집중력과 에너지가 정말 감탄스러웠다. 김감독 고유의 빛깔이 혹시 내 객기 탓에 변질되는 건 아닌가 걱정도 컸지만 결과적으로 흡족하다."(장동건)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해안선'의 주연 장동건(30). 그가 김기덕 감독의 여덟번째 영화 '해안선'에 출연하기로 한 올 초, 충무로는 장동건-김기덕 커플의 앞날을 점치기에 분주했다. 비유하자면 출생 환경과 성격이 양 극단을 달리는 남녀의 만남이라고 할까. 김감독의 전작들이 보여준 비주류적이고 때론 엽기적이기까지 한 감성과, 만화책 속 '꽃미남'이 걸어나온 것 같은 장동건의 이미지는 분명 '쿵!'하고 충돌을 빚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완성된 '해안선'에서 '잘못된 만남'의 기미는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장동건은 이 영화에서 민간인을 간첩인 줄 알고 쏘아 죽여 끝내 미쳐버린 강상병이라는 배역을 온전히 소화해냈다. 감독과 배우는 자신들의 궁합이 잘 들어맞았음을 확인하고 흐뭇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그리고 장동건은 '자신감'이라는 두둑한 보너스까지 챙겼다.

그를 부산영화제 개막식 다음날인 지난 15일 오전 숙소인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만났다. 그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단박에 눈에 띈 건 한 구석에 매달린 링거병이었다. 감기 몸살에 장염 증세까지 겹쳐 사흘 동안 물을 빼고는 아무 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는 게 매니저의 귀띔이었다. 그 자신도 인터뷰 도중 "내가 너무 힘없이 말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해안선'출연을 스타 배우의 변덕 내지는 일회성 외도 정도로 바라보는 비딱한 시선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다시 한번 같이 하자고 하면 응할 것인가.

"물론이다. 배역만 내게 맞는다면 언제든지 OK다. 좋은 작품이 스타의 출연으로 인해 더 많은 관객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다. 내가 좋은 선례를 남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점점 광기에 사로잡혀 나중에는 명동 한복판에서 시민을 찔러 죽이는 강상병의 캐릭터가 아주 인상깊었다. 어제 기자회견에서 "인터뷰를 뻔뻔스럽게 하기 위해 영화를 미리 보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제 영화를 본 소감이 어떤가.

"강상병은 난이도가 무척 높은 역이었다.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지레 겁을 먹기도 했고, 촬영하면서도 애도 많이 끓였다. 결과물을 보니 여전히 역부족임을 느낀다. 하지만 강상병은 다른 영화에서 찾아보기 힘든, 감정의 폭이 깊고 넓은 인물이다. 강상병을 파고 들면서 많은 공부가 됐다. 만족스럽다."

-출연료를 파격적으로 낮추고 모험을 한 보람을 느낀단 말인가.

"그렇다. 내게 영화는 두 종류다. 끝내고 났을 때 소중한 경험이 됐다고 느끼는 경우, 그리고 내가 소모됐다는 허탈감에 사로잡히는 경우다. 전자에 속하고 싶어서 '해안선'을 택했고, 운 좋게도 기대가 맞아떨어졌다. 풍부한 경험에서 훌륭한 연기가 나온다는 건 진리다. 하지만 난 파란만장한 생을 살지도 않았고, 배우로서 살다보면 그럴 기회가 적다. 그럴 때 내게 가장 좋은 교과서는 연기다. 연기를 통해 사람을 배우고 현실을 깨치는 셈이다."

-강상병이 간첩 잡는 데 혈안이 되는 것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그런데 촬영에 들어가기 전 2박3일간 특별 훈련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연기 때문에 고민이 무지 많았는데 훈련을 받다 보니 잡생각이 싹 사라졌다. 육체적으로 한계가 올 때까지 밀어붙이는 상황이 되면 사람이 매우 단순해질 수 있겠더라. 게다가 '해안선'의 부대 주변엔 공비가 몇 차례 출현했던 걸로 설정돼 있으니 설득력이 없지 않다."

-'해안선'에는 원래 정사 장면이 있었던 걸로 안다. 영화를 보니 강상병이 오인사살을 하고 특박을 나와 여자친구를 만나 발작적인 행태를 보이는 대목이 있던데, 그 부분에서 베드신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맞다. 시나리오를 보면 거기에 정사 장면이 나온다. 김감독과 토론 끝에 내 주장이 받아들여져 뺐다. 그런데 완성된 걸 보니 거기서 섹스를 했다면 예기치 않게 사람을 죽이고 두려움에 어쩔 줄 모르는 강상병의 애처로움이 부각될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도 들더라."

-너무 몸을 사리는 것 아닌가. 요즘 한국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당위성이 충분한 장면에서도 지나치게 소극적이다. 환골탈태하려 택한 영화에서 또다시 선을 그어버린 것 아닌가.

"음…, 솔직히 말하면 부담스러웠다. 관객들이 강상병의 고뇌를 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장동건이 벗었다'는 것에만 흥미를 느낄 것 같아 싫었다."

-사람들이 하도 꽃미남, 꽃미남 하니까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남자답게 보이는 것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을 법도 하겠다. 특히 이번에 군인으로 나온다니까 그렇게 보는 시각이 많던데.

"특별히 그런 건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친구'등 내 출연작들이 대개 남성적이고 선이 굵긴 하다. 난 '대부'나 '스카페이스'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내 취향이 그런 것 같다."

-미국 진출 계획은 어떤가. 박중훈은 지난달 '찰리의 진실'로 할리우드에 데뷔했는데.

"물론 꿈은 있다. 미국 영화제작사로부터 제안을 몇 차례 받고 한때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섣불리 덤벼들지 않을 참이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는 법이니까. 중훈이형은 그런 점에서 준비된 배우였고, 나는 아직 준비하는 과정에 있다."

부산=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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