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 딛고 새출발 KBS'개그 콘서트'팀 : 참깨 짜듯 머리 짜야 고소한 웃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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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 KBS '개그 콘서트'호(號)는 겹태풍을 맞았다. 선장격인 담당 PD가 배임수재 혐의로 구속돼 오랫 동안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 무렵 심현섭·황승환·박성호 등 '개콘'의 주축 다섯명이 경쟁사인 SBS에 출연키로 했다. 전력 누수는 불을 보듯 뻔했다.

이 위기 상황에서 매주 시청률 5위권에 랭크됐던 '개콘(개그 콘서트의 줄임말)' 호는 영원히 가라앉을 것인가.'개콘'의 저력은 여기서 발휘됐다. 새 선장이 임명됐고 능력있는 새 선원들이 자리를 메웠다.

이들은 머리를 쥐어짜며 다소 거칠지만 한층 신선하고 쾌활한 개그를 선보였다. 생활사투리·우격다짐·도레미 삼형제 등 코너마다 각각의 열렬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시청률도 오히려 급반등해 수주째 30%를 넘고 있다.

아이디어 회의부터 리허설을 거쳐 실제 녹화무대까지….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의 일주일은 어떻게 지나갈까. '박준형의 생활사투리' 팀을 따라 현장 속으로 들어갔다.

# 혼돈(混沌)-아이디어 회의를 하다

6일 낮 서울 여의도 KBS 연구동 401호실. 이곳은 '개콘' 출연자를 위한 특별한 공간이다. 매주 수요일마다 출연자 모두가 이곳에 모여 아이디어 회의를 연다.

"말이 아이디어 회의지, 그냥 노는 거예요. 잡담하다 딱 떠오르는 얘기를 머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어허 샘(선생님의 사투리)이 부르는군요."

'청년백서' 팀에서 얘기를 나누던 박준형(30)은 눈깜짝할 새 '갈갈이 3형제' 팀으로 이동했다.

"형, 사투리 개그 언제 짜요?"

후배들의 성화에 박준형이 한구석의 '생활 사투리' 팀으로 자리를 옮겼다. TV 영어 강좌를 패러디해 경상도·전라도 사투리를 배워보는 '생활 사투리' 코너는 요즘 가장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진행자 박준형과 네이티브 스피커 정종철(25), 전라도형 스피커 이재훈(29), 경상도형 스피커 김시덕(22)은 이미 단단한 팀워크를 자랑하고 있다. 이날 새로 선보일 문장은 '당신 정말 부자시군요'.

"상대방이 부자니까 나는 납작 업드리는 거야. 친하게 지내장께, 어때?"(이재훈)

"내가 옛날에 부자 친구가 있었는데, 아 그놈이…."(김시덕)

아이디어를 내는 건지 잡담을 하는 건지 불분명한 회의는 그렇게 세시간이 넘도록 계속됐다.

# 살벌(殺伐)-리허설에서 퇴짜맞다

공포의 금요일. '개콘' 출연자들은 리허설이 있는 날을 이렇게 부른다. 개그맨들은 그간 준비한 내용을 선보이고 이를 본 PD는 코너의 생사(生死)를 결정한다. 이날은 희망의 날이기도 하다. 꿈의 무대에 서기를 갈망하는 무명 신인들이 각종 개그를 들고 나온다. 또한 이날은 죽음의 날도 된다. 고정 코너라도 내용이 부실하다 싶으면 가차없이 잘린다. 리허설은 실제 방송 순서와 똑같이 진행된다. 그러나 현장 속 즐거움과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살벌함 그 자체다. 연기를 지켜보는 동료들의 웃음 강도에 따라 자연스레 점수가 매겨지기 때문이다.

첫 타자는 왕과 희빈의 인터넷 채팅을 다룬 '만약에' 코너. 좌중에 웃음이 연신 터졌다. 출연 OK. 다음은 김지선 등이 출연한 '용용 남매'. 반응이 썰렁하다. 아니나 다를까 담당 PD의 한마디.

"재밌긴 한데 좀 썰렁하다. 좀더 다듬어봐." 이번 무대엔 기약이 없다. 어느새 이들 사이엔 희비가 엇갈린다.

'생활 사투리' 팀이 등장했다.

"에, 당신 부자시네요, 전라도 버전!"

"친하게 지내장께∼."

피시식 웃음이 새 나온다.

"이번엔 경상도 버전!"

"돈좀 빌리도."

무반응이다. 한쪽에서 들리는 PD의 성난 목소리. "경상도 버전 다시 짜와!" 승승장구하던 '생활 사투리'팀은 5주만에 처음으로 퇴짜를 맞았다. 당장 다른 아이디어를 내지 않으면 방송에 나가지 못할 상황, 이들은 구석에 모여 앉아 다시 한번 머리를 맞댔다.

리허설이 이뤄진 세시간 동안 승자는 편하게 남의 개그를 즐겼고 패자는 구석에서 아이디어를 쥐어짰다. 승부의 세계는 냉정했다.

# 폭소(爆笑)-관객의 웃음보를 터뜨리다

'개콘' 녹화가 있는 월요일 저녁, 직원들이 모두 퇴근한 7시부터 여의도 KBS 별관 공개홀은 술렁인다. 7백석도 모자라 계단마다 빼곡히 사람들이 들어찼다.

무대 뒤 출연자 대기실에도 긴장감이 돈다. 우격다짐 이정수는 스프링노트를 보며 연신 대사를 읊조린다. 김숙은 이장님과 함께 "아부지!"를 외치며 연습에 여념이 없다.'그렇습니다'에 출연하기 위해 금색 비닐옷을 입은 박준형은 옥동자 정종철과 함께 '갈갈이 3형제' 대사를 맞춰본다.

드디어 무대에 조명이 켜졌다. 무대 진행자가 소리친다. "스탠바이! 박수 치세요." 시작은 늘 객석의 갈채다.

기대 반, 흥분 반 속에 쇼는 시작됐다. 녹화 장면과 실제 TV 방영 장면은 거의 비슷하다. 3년 이상 호흡을 맞춰온 덕분인지 NG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바보 삼대' 코너가 한창 무대를 달굴 무렵, '생활 사투리'팀은 무대 뒤에서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많이 긴장되죠. 그런데 막상 무대에 올라가면 그냥 즐거워져요. 일주일간 고생한 걸 '탁' 해소해버리는 느낌이랄까…. 그 맛에 개그합니다."

'생활 사투리' 팀이 무대에 섰다. 리허설 때보다 옷차림도, 표정도, 대사도 한층 근사하고 풍부하다. 며칠 전 퇴짜맞은 경상도 버전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내용은 17일 방송된다.

박지영 기자 naz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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