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집이 속삭이는 삶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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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통의동 35번지에는 지금 대림미술관이 서 있다. 지난해 가을, 이 곳에는 아홉 식구가 함께 살던 양옥이 있었다. 가정집으로는 큰 편인 이 건물을 사들인 대림 쪽은 미술관으로 개조하기 위해 부수기 전 낡은 집이 품고 있는 무수한 흔적들에 주목했다.

오랜 시간 몇 대에 걸친 가족들의 자취가 켜켜이 배어 있는 건물을 그냥 없애기가 안쓰러웠다. 미술관은 그 추억들을 기록하고 되새김질하기 위해 작가 우순옥(44)씨를 불렀다. 장소와 시간을 붙들고 그 의미들을 찾아온 우씨에게 이 집을 보여줬을 때 작가는 '아!' 낮게 소리질렀다. 그가 기다려온 숨쉬는 캔버스가 거기 있었다.

30일까지 대림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순옥, 장소 속의 장소'전은 덧없는 삶이 한때 몸을 맡겼던 자리에 대한 예술적 해석이다. 망치가 벽을 때리기 전, 한 달 동안 작가는 빈 집에 머물며 사진을 찍고 소리를 듣고 묵은 냄새를 맡으며 집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걸러냈다.

첫 발걸음은 하늘하늘 흔들리는 커튼에서 시작한다. '주름의 방'이다. 신비한 뭔가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은은한 빛 뒤에서 사람들은 살짝 숨을 몰아쉬고 커튼을 젖힌다. 미궁 같은 방에서 관람객들을 맞는 것은 2백40장의 슬라이드 프로젝션에서 뿜어져 나오는 색과 빛의 아롱거림이다. 그 빛은 착잡하고도 아련한 기억을 불러온다.

회랑을 따라 또 다른 커튼을 통과한다. 흑백 필름에는 작가 자신이 명상하듯 담아낸 몸짓이 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들고, 꽃을 안고, 육신을 풀어놓는다. 몸은 그 자체가 집을 이루는 결이 된다.

또 다른 방에는 옛 집에서 떼온 샹들리에들이 모여 있다. 반짝이는 유리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망각의 늪에서 날아오는 그림자들이 일렁인다. 발길은 일상의 방에서 예술의 방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상의 방으로 돌아온다.

마지막 방에서 관람객들이 만나는 건 벽에 새로 새겨진 드로잉이다. 흰 벽면에 푸른색 파스텔로 그린 형상들은 이런 시를 담고 있다. "지금, 여기/항상 집으로/부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알레고리/작은 방들, 벽들, 우연성의 그물들/주름에 의한 주름/거울의 문/아무 것도 아닌 것/사라지는/빛!/그 사이들…/방을 떠나 계단에서 길을 잃다/장소도 시간도 아닌/나는 당신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커다란 거울이 한 장 창문을 마주해 걸려 있다. 그 거울 속으로 마당과 그 너머 산과 나무, 자연이 들어와 앉는다. '장소 속의 장소'. 우리는 모두 어떤 장소 속의 장소 속에서 살다 돌아가는지 모른다. 02-720-0667.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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