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장에 인정을 색칠할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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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칼바람이 매섭던 지난주 금요일 오후, 서울 안국동 45번지 '아름다운 가게(이하 아가)' 본부 담벼락에 그 바람을 맞으며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붓질 한 번 하고 나면 곱아진 손을 '호호' 불어야 하는 기습 추위도 그의 뜻을 막지 못했다.

화가 유양옥(58)씨는 "하루라도 빨리 마무리지어 '아가'를 찾는 이들을 기쁘게 하고 싶다"며 지는 해를 아쉬워했다.

벌써 한 달 째 그는 거리의 화가로 길바닥을 지키고 있다. 쓰지 않는 물건들을 기증받아 싸게 판 수익금으로 이웃을 돕는 중고품 복덕방 '아가'가 지난 달 18일 문을 연 뒤 문전성시를 이루자 "그럼 나는 그림 품으로 자원봉사하겠다"고 나선 유씨다.

건물을 빙 둘러 25m에 이르는 콘크리트 담에는 화가가 '우리 동네'라 이름 붙인 정겨운 풍광들이 태어나고 있었다.

'아가'같은 모임들이 풍성하게 열매 맺어 우리 사회가 더 잘 되기를 비는 포도그림, 이웃끼리 정답게 보듬고 살았던 옛날을 되살린 정자나무 언저리 풍경, 서로 품을 팔아 오순도순 돕고 지내던 두레의 전통 등 옛 민화를 보는 듯한 문양과 화풍이 단풍보다 더 고운 빛깔로 피었다. 유씨는 이 작품을 벽화라는 이름 대신 '그림담'이라고 불렀다.

"'아가'가 선 이 골목이 차가 적고 쓰레기가 없으며 어른들을 존경하는 동네가 됐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렸습니다. 이 그림담이 생기면서 주차선이 없어졌는데도 동네 분들이 찬성해 주셔서 참 고마웠어요. 경복궁 꽃담의 인상을 이어가려 애썼는데 잘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아이들이나 할머니가 봐도 다 이해되는 쉬운 그림을 그리려 노력했는데 어떨지…." 화가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미감을 그림담에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유양옥씨는 우리 화단에서 기인으로 통한다. 나이 사십이 넘어 그림을 시작했지만 늦깎이라고 하기엔 미술에 관한 기초가 탄탄한 사람이다. 사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에 이미 최순우 전 국립박물관장과 한학자인 임창순 선생에게서 한국미를 꿰뚫는 안목을 전수받았다. 검여 유희강에게 서예를, 만봉 스님에게 단청을 배웠고 화론과 한학 공부는 하루도 쉬지않는 기본이다.

그가 지난 몇 년 새 열었던 개인전 '유양옥 그림판'에서 선보인 수묵진채화는 이번 '아가' 그림담에서 한층 대중적이면서도 힘찬 색감과 필선을 얻었다.

그가 환경훼손 지역에 달려가 환경보호를 염원하는 부적을 그려 붙이고, 지역문화를 위해 일하는 일꾼들에게 힘내라고 응원 부채를 그려 선물하는 까닭을 물어봤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미안해하고, 가난한 사람이 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할 줄 알았던 민심의 향기가 그립군요." 짐짓 딴전을 부리는 화가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곱게 물들었다.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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