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는 장난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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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미 통과된 법안을 사상 초유로 재의결하는 어제 국회 본회의에서 또 한차례 해프닝이 일어났다. 의결 정족수 미달로 며칠전 통과된 법안을 전면 무효화하고 새로 표결을 하는 마당에 대리투표를 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의결 정족수 미달 법안에 대한 재의결은 비록 여론의 비판에 떼밀려 이뤄진 것일지라도 일단 평가할 만하다. 잘못을 시인하고 고치는 것은 늦었더라도 잘하는 일이다. 또 지금껏 사용을 미뤄왔던 전자투표 실시도 더 이상 과오·변칙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박관용 의장은 의결 정족수 논란을 원천적으로 불식시키겠다며 이날 전자투표 시스템을 가동했다. 상임위에서 만장일치로 회부된 법안에 대해선 본회의장 주변 의원들까지 재석에 포함시켜 이의 유무만 확인한 뒤 처리했던 관행을 뜯어고치려는 의지로 이해된다. 전자투표는 특히 의원 각자의 가부 의사가 분명히 드러나는 만큼 책임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국회사에 기록될 만한 투표가 실시된 바로 이날 두 건의 대리투표 행위가 있었던 것이다. 투표 행위의 모독이요, 국회의원으로서 자긍심을 망각한 처사다.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본회의를 통과해 국민생활을 규제·보호하게 될 법의 존엄성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투표를 장난 삼는 망발은 없었을 터다.

한나라당 이상배 의원은 대리투표를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러나 세 차례 대리투표를 하다가 국회 직원으로부터 지적을 받은 민주당 박상희 의원은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다. 그저 옆자리 투표기기를 들여다봤을 뿐이라며 변명하고 있는데, 문제는 옆자리 의원이 자리를 비운 사이 이뤄진 3건의 법안에 찬성 기표가 돼 있는 점이다. 대리투표에 거짓말까지 하고 있다면 '이런 국회의원이!'하는 탄식이 나올 수밖에 없다. 해당의원들을 윤리위에 회부하는 게 마땅하다. 재의결 사태, 대리투표 행각 등은 국민이 국회를 끝없이 감시할 필요성을 웅변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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