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특구법 무산 위기 中·홍콩등 쾌재 부를 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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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경제자유구역법이 국회에서 무산될 위기에 처한 것은 경쟁국인 중국이나 싱가포르·홍콩의 입장에서는 만세를 부를 일이다. 이들은 이미 동북아 비즈니스 중심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저만치 앞서가는데, 우리는 관련법조차 만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1년여 준비해 온 정부=제조업만으로, 그리고 우리 자본만으로 먹고 사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그 돌파구로 경제자유구역 구상이 나왔다.

세계 3대 교역권의 하나인 동북아시아의 물동량을 끌어들이고, 다국적 기업도 유치하자는 것이었다. 다행히 우리가 중국과 일본의 가운데 있다는 지리적 이점도 있었다. 외국 자본이 들어오면 자연히 고용도 늘고, 국내 제조업에도 활기를 불어넣을 것이라는 판단도 깔려 있었다.

이를 위해서는 특정 지역을 지정해 각종 규제를 확 풀고, 외국인이 들어와 사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해주는 게 급선무였다. 그래서 경제자유구역에서는 ▶세금을 깎아주고▶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하는 방안을 추진해 왔다.

재정경제부 박병원 경제정책국장은 "경쟁국과 누가 먼저 외국인을 만족시킬 만한 제도와 환경을 갖추느냐를 놓고 시간 싸움을 벌이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변질돼 온 법=경제자유구역법을 만드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총론에는 찬성하던 각 주체가 각론으로 들어가면서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재경부가 지난 8월 법 초안을 입법 예고하자 노동계·재계·시민단체는 물론 정부 내에서도 반대가 많았다.

교육부는 외국인학교의 설립·입학 조건을 완화하는 것에 반대했고, 노동부는 외국 기업에 ▶월차·생리휴가를 폐지하고▶파견근로제를 무제한 허용하는 것은 평등권에 위배된다며 반발했다.

노동계는 노동권을 박탈하는 악법이라고 경고했고, 재계는 외국 기업만 혜택을 주는 것은 국내 기업에 역차별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정부 내에서 다시 두달 동안 의견을 조율한 끝에 지난달 초안에서 후퇴한 수정안이 나왔다. 논란이 된 월차휴가는 원안대로 폐지하되 생리휴가는 무급휴가에 한해 허용하기로 했다.

하지만 수정안은 이달 국회 재경위 심의에서 또다시 바뀌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경제자유구역 지정 기준 자체를 '국제 공항·항만 등을 갖춘 지역'에서 '교통시설을 갖춘 지역'으로 완화한 것이다. 심하게 말하면 내륙 아무 곳에서나 지정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자 노동계의 반발이 더욱 세졌다. 이렇게 지정 요건이 완화되면 전국 곳곳으로 월차휴가 폐지 등 예외 조치가 퍼질 우려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눈치 보는 정치권=국회는 경제자유구역법 처리를 오는 14일 본회의로 잡아놓고, 13일께 실무 협의를 할 방침이나 통과 여부는 불투명하다. 지정 기준을 완화하자는 한나라당의 주장과 몇몇 지역에 집중해야 한다는 민주당의 의견이 엇갈리는데다 대선을 앞두고 이해관계자들의 눈치를 보기에 급급하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고현곤·남정호 기자

hkko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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