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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대한 물음2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장동건이 조직 사무실을 나섰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는 개의치 않고 양복 깃을 올린 채 담배 한개비를 빼물어 불을 붙인 다음 길게 한모금 들이마신다. 그 때 한 사나이가 우산을 쓴 채 마주오며 그의 곁을 스치는 듯하다간 가슴팍으로 들러붙어 칼로 난자하기 시작한다. 비틀거리는 장동건은 전봇대에 기댄 채 낮게 내뱉는다. "그만 해라. 많이 묵었다 아이가. " 비는 거세게 퍼붓고 그의 몸에 흐르는 피는 빗물에 섞여 하수구로 흘러간다.

케이블 TV에서 영화 '친구'를 보다가 나는 이 장면에서 채널을 돌려야 했다. 더이상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우정과 신의가 메말라 버린 세태라지만 조폭 영화를 통해 의리의 가상 체험을 이처럼 잔혹하게 즐기려 하는가. 그게 또 무슨 의리인가. 친구인 라이벌 조폭을 하수인을 시켜 처참하게 죽여야 하는 짐승보다 못한 행태에서 무슨 의리와 우정을 논하겠는가. 굳이 이런 일련의 폭력 영화가 우리 사회의 폭력을 만연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단언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잔인한 폭력배의 여러 행태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대체로 인지할 수 있다.

"나는 깡패를 보면 잠이 안온다"는 검사가 있다. 조폭과의 20년 전쟁을 불사하면서 '해방 이후 최고의 악질 검사'로 정평나 있는 조승식 검사다.

대한민국 최고의 깡패 김태촌을 체포한 것도 그고 호남 주먹의 대부 이육래, 부산 주먹계의 거물 이강환·천달남을 감옥으로 보낸 것도 그다 (신동아 2001년 11월 호). 조검사가 부임하는 곳에 조폭이 있었고 그는 어김없이 이 조폭들과의 전쟁을 벌여 왔다. 결국 검찰의 의지에 따라, 검사의 사명감에 따라 조직 폭력배가 파악되고 검거된다는 것이다.

1998년 6월 파주 스포츠파라는 조폭의 내분과 관련된 살인사건도 검찰이 파악한 혐의내용은 조폭 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두목 신씨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사이 주도권을 놓고 대항 관계에 있던 박씨가 반란을 시도한다. 감옥 속의 두목이 부하 조씨에게 살인지령을 내린다. 조씨는 박씨의 집을 급습, 동맥을 끊어 살해한 뒤 자살로 위장한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다. 경찰 조사도 자살로 처리됐다. 그러나 감옥 속의 두목 신씨의 지시 사항을 알고 있던 감방 동료인 이씨가 출옥한 뒤 이 사실을 불겠다고 위협하자 이씨마저 살해한다'.

이 끔찍한 살인사건은 한 검사의 집요한 추적이 없었다면 그냥 묻혀 버리고 말 사건이었다. 2000년 서울지검 강력부 검사로 온 홍경령 검사는 이 사건에 의문을 품고 집요한 수사를 벌인 끝에 살인 혐의 주모자와 가담자를 체포했다. 그러나 한명은 도주하고 한명은 검찰 조사 중 구타 사망이라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면서 사건 검사가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홍검사가 어느 정도 구타 사망에 '개입'돼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불의와 맞서 사명감 하나로 법의 수호자임을 자임해온 검사가 하루 아침에 고문 검사로 낙인찍혀 폐기처분되는 데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검찰의 피의자 구타 사망에는 인권과 폭력이라는 두개의 이질적 요소가 혼재해 있다. 조폭의 인권도 보호돼야 마땅한 인권의 원칙과 조폭의 살인 폭력은 마땅히 응징해야 한다는 법과 질서의 원칙 두 경계선상에 이번 사건은 자리잡고 있다. 아무리 조폭이고 살인 혐의자라 해도 수사관의 고문 치사는 무슨 논리로도 변호할 수 없는 분명 잘못된 일이다. 그래서 인권 대통령으로선 마땅히 검찰을 질타하고 개선책을 내라고 지시할 만했다. 그러나 여기에 한가지 빠진 사실이 있다. 인권 대통령으로서뿐만 아니라 법과 질서의 최후 보루인 대통령으로선 조폭과 깡패를 보면 잠이 오지 않는 법의 수호자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도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이 정부 들어 폭력의 흑색사회에서도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는 소문이 들린다. 이젠 유흥가를 둘러싼 구역 싸움만이 아니라 벤처사업가로, 연예기획사로 조폭의 행태와 권력 분포가 달라지면서 세 확장이 크게 번지고 있다는 소리다.

그럼에도 90년대 이래 계속됐던 범죄와의 전쟁이나 폭력배 소탕 같은 법의 소리는 나온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파주 같은 좁은 지역의 조폭들이 2명을 감쪽같이 죽이고도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지, 그렇다면 큰 규모의 조폭들은 지금 어떤 살인과 못할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이에 대한 정부대로의 대응이 있어야 한다. 인권 침해도 질타해야 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배경에 자리잡은 조직 폭력에 대한 질타도 병행해야 한다.

임기말 어수선한 공권력의 틈을 비집고 흑색사회가 어떤 준동을 할지, 이를 지킬 법의 수호자가 모두 인권만 탓하면서 뒷짐만 지지 않을지 이를 걱정하는 대통령의 목소리도 함께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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