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전문성 무시한 기념관 건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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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건축계가 최근 문을 연 기념관 두 곳 때문에 울고 웃었다. 지난달 22일 서울 효창동에 개관한 백범기념관과 25일 강원도 양구군 정림리에 선 박수근미술관이 그들이다. 한국에서 기념관은 무엇이고, 기념관을 짓는 건축가의 구실은 무엇인가를 새삼 돌이켜보게 만든 희비 쌍곡선으로 요즈음 건축 동네에 말이 많다.

백범기념관은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을 기려 국민성금을 보태 세워졌다. 2000년 6월 건축현상설계에 당선된 임재용(41·건축사사무소 O.C.A 소장)씨는 정사각형의 단순명쾌한 뻐대에 회랑으로 기념의 의미를 더한 설계작을 내놓아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지금 서 있는 건물은 현상안이 아니다. 백범기념관건립위원회는 '배 놔라 감 놔라' 시시콜콜 건축가를 물고 늘어졌고, 건축가는 여러 차례 수정을 거치는 치욕 속에서도 최악으로 가는 걸 막는 데 애썼다.

결과는 참담했다. 건축가 말을 빌리면 "살아 있는 사람들이 백범과 즐겁게 어울리는 공간을 그렸으나 무덤이 되고 말았다"는 것. 지하에 설계됐던 대부분 프로그램이 다 지상으로 올라오면서 열주가 서고 이런저런 방들이 들어선 기형아가 탄생했다. 여기에 '임재용'이란 건축가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그는 "그 분들마저 건축논리를 소모품으로 여길줄 몰랐다. 그것은 민족주의 사학자의 작품일 뿐"이라고 씁쓸해했다.

이에 비하면 박수근미술관은 관과 민이 만나 일구어낸 행복한 이중주다. 화가 박수근의 고향인 강원도 양구군(군수 임경순)은 현상안 당선자인 이종호(45·스튜디오 메타 소장)씨가 "박수근 그림처럼 대지에 미술관을 새겨나가겠다"는 뜻을 내비친 순간부터 건축가가 일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한두 자 크기로 부수어진 화강석 덩어리가 쌓인 기념관 담은 그림의 표면 질감과 건축의 거죽이 겹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낳았다.

지난 8월 민규암(토마건축 소장)씨는 자신의 현상안 당선작을 변경해 시공한 서대문 구청을 상대로 낸 건축 저작권 관련 소송에서 승소해 관 프로젝트에 억눌려 지내던 건축가들 숨통을 터주었다. 이 나라에서 건축가를 구하는 일은 누구의 몫일까.

정재숙 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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