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 최후의 칼을 뽑아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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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면

제8보

(112~141)=112로 하나 선수해두고 얼른 하변을 지킨다. 胡7단은 중키에 평범한 느낌을 주는 얼굴. 그런데 이 스무살의 청년도 李9단에게 전염됐는지 표정에 거의 변화가 없다. 대개의 프로들은 자신이 이창호9단이란 강자를 이기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머지 그만 터무니없는 곳에서 실수하고 만다. 그런데 이 청년은 그저 판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남은 시간은 李9단이 25분, 胡7단은 20분. 바둑은 평이해 보이고 죽고 사는 사활문제도 일어날 것 같지 않다. 초읽기도 있으니까 시간은 충분하다고 봐야 한다. 이런 모든 정황이 '이창호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끝내기에 접어들었으니까 李9단이 좀더 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정도로는 바둑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 검토실의 진단이었다. 3집반일까. 그러나 철벽처럼 굳어진듯보였던 이 바둑도 아직 마지막 드라마를 남겨두고 있었다.

117은 반상 최대의 곳이며 125의 빈삼각에서부터 李9단은 서서히 우측 백대마에 칼 끝을 겨누기 시작했다. 127은 조훈현9단의 흔들기를 연상케 하는 수법. 李9단도 벼랑에 몰리자 거칠고 사나운 헤딩으로 변화를 도모한다.

胡7단은 부지런히 128부터 우상 백을 살려 갔는데 그 와중에서 흑돌이 129,131로 자연스럽게 중앙에 벽을 만들게 되었다. 李9단이 진짜 노리는 대상은 우하 백대마. 그는 공격이 전공은 아니지만 상황이 긴박하게 되자 이 백을 향해 공격수를 연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141로 파호해 李9단은 드디어 최후의 칼을 뽑아들었다.

박치문 전문기자

daroo@joongang.co.kr

협찬:삼성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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