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르 선언'도 UR꼴 날까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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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북핵, 북핵...'하다가 APEC(아태경제협력체)회의가 끝났다.

지난 22일 도쿄에서 혼다재단이 주최한 '동아시아의 공생(共生)·공존(共存)·공영(共榮)·공화(共和)'에 관한 국제 심포지엄에서도 APEC이 논의됐다. 그것이 '무역·투자의 자유화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느냐'아니면 '아태 정상들이 일년에 한번 모여 덕담이나 하는 곳이냐'는 것이었다.

한 토론자가 하타케야마 국제경제교류재단 회장에게 물었다. "한국을 선진국으로 보느냐, 개도국으로 보느냐"고.

"국민소득으로 보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선진국 모임)에 가입한 걸로 보나, 한국은 선진국 아니냐"는 게 그의 간단한 대답이었다.

토론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렇다면, 한국이 보고르(Bogor)선언에 따라 2010년까지 무역과 투자를 완전히 개방할 것으로 보느냐"는 것이었다(1994년 인도네시아 보고르에서의 APEC 정상 선언에 따르면 '회원국 중 선진국은 2010년까지, 개도국은 2020년까지 무역과 투자를 완전 자유화'하게 되어 있다).

하타케야마 씨는 묵묵부답이었다.

대외개방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자세는 정평이 나 있다. 남에게 무얼 팔 때는 '우리가 선진국이니 우리의 좋은 물건을 사라'고 하다가도, 남의 것을 사야할 때는 '우리는 아직 개도국이니 우리에게 물건을 팔지 말라'고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APEC 같은 자리에 나가서는 '우리는 선진국이고 또 자유무역을 신봉해 스스로 추진한다'고 자랑하다가도, 무역협상을 담당하는 공무원이나 농민들은 '그동안의 수입자유화는 강요된 것이고, 우리는 아직 취약한 게 많은 개도국이라서 추가 개방하기 힘들다'고 꼬리를 내리곤 한다.

눈앞의 이해에 따라 선택적으로 '선진국이었다 개도국이었다'하는 것이다. 그런 조삼모사(朝三暮四)를 두고 나라 밖에서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보고르 선언 때 '16년 뒤의 일인데, 뭘'하고 쉽게 생각했듯이, 지금도 '8년 뒤의 일인데, 뭘' 하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2010년 그 해도 어느 날 갑자기 다가올 것 같다. 그 해 말에도 "보고르 선언 약속에 따라 완전 개방하든지, 아니면 세계무역의 8할이 이뤄지는 아태무역체제에서 쫓겨나든지"라는 양자택일의 벼랑끝 선택을 강요당하지나 않을까. 우루과이라운드 때처럼.그 날이 겁난다.

우리 스스로를 선진국으로 볼지, 개도국으로 볼지 그 선택을 미룰 시간은 많지 않다. 아무리 '한국의 1년은 세계의 10년'이라고 해도 그렇다.

econop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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