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놈' 이후는 '피지옴' 시대 <Physiome>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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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체지놈사업이 완성되면서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들이 많다. 조물주가 창조한 인체의 설계도가 낱낱이 밝혀졌으므로 암을 비롯한 난치병의 극복은 물론 맞춤형 인간과 불로장생의 꿈까지 이룰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생명 현상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이미 낭포성 섬유화증이나 근이영양증 등 몇가지 난치병에서 유전자가 규명돼 있다. 하지만 이를 바꿔친다고 해서 바로 치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암을 비롯한 대부분의 난치병은 한 개가 아닌, 수십 수백개의 유전자가 동시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를 5만∼10만개 정도로 추산했다. 그러나 인체지놈사업으로 밝혀진 유전자의 숫자는 불과 3만5천여개다. 이것은 한 개의 유전자가 단지 한 개의 생명현상만을 주관하진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신진대사와 질병발생 등 인체 내에서 수행되는 수천만개의 생명현상은 이들 유전자의 상호 작용으로 이뤄진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오늘날 팽배하고 있는 유전자 만능주의에도 경종을 울려준다. 일란성 쌍둥이를 보자.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이들이 특정 질환에 동시에 걸릴 확률은 20∼50% 정도다. 유전자는 1백% 동일하지만 누구는 병에 걸리고 누구는 병에 걸리지 않는 이유는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상호 작용의 차이란 것이다.

생명공학에서도 나무보다 숲을 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유전자 낱개를 규명하기보다 인체란 전인적 시각에서 유전자끼리의 상호 작용에 주목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분야가 피지옴(physiome)이다. 피지옴이란 '생명'을 뜻하는 접두사 physio와 '전체'를 뜻하는 접미사 ome의 합성어다. 피지옴은 1995년 미국 워싱턴대의 제임스 배싱웨이트 교수가 처음 제창한 이론으로 구조보다 기능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금세기 과학계 최고의 화두인 지놈(genome)과 대비된다.

인체지놈사업으로 인체를 구성하는 30억개의 유전자 벽돌의 순서는 낱낱이 밝혀졌다. 그러나 몇번째 벽돌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른다. 이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피지옴이다.

피지옴은 생명현상이란 숲을 보기 위해 IT기술을 동원한다. 수천, 수만가지의 가능성을 IT기술을 이용해 시뮬레이션 해낸다는 것이다. 지놈이 유전자를 분자 단위까지 파고들어가는 미시적 개념이라면 피지옴은 IT와 BT가 협조해 생명현상을 밝혀내는 거시적 개념이다.

1997년 미 식품의약국(FDA)은 다국적 제약회사 호프만 라로슈가 신청한 고혈압 치료제 미베프라딜에 대해 일부에서 심장 부작용이 관찰됐다며 허가를 보류했다. FDA는 1천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다시 임상시험을 해 안전성을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라로슈는 1백명에서만 임상시험을 실시하고 나머지는 피지옴 이론을 이용한 가상심장을 통해 안전성을 확인하고 허가를 받았다. 9백명에게 임상시험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과 비용이 절감된 것이다. 만의 하나 있을 수 있는 부작용을 강요하지 않으므로 윤리적 차원에서도 피지옴은 바람직하다.

피지옴은 인체지놈사업 이후 난관에 봉착한 생명공학의 돌파구를 뚫어준다는 점에서 각광받고 있다. 이미 세계생리학회를 주축으로 장기별·조직별로 피지옴을 응용한 가상 장기와 조직을 만드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일본 게이오대학과 미 국립보건원은 가상 세포를 만들고 있으며 많은 생명공학 벤처들이 피지옴 연구에 뛰어들고 있다.

생명은 결코 물리나 화학법칙 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물리와 화학법칙에 기반을 두고 탄생한 지놈 만으론 복잡다단한 생명의 신비를 풀 수 없다는 뜻이다.

인체지놈사업의 완성으로 모두 들떠 있는 지금 우리는 오묘한 생명 현상에 대해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피지옴은 비록 생명 현상의 실체를 1백% 알 순 없지만 IT 기술을 접목한 모의실험을 통해 실체와 가장 근접한 수준까지 파악하는데 도움을 준다. 이미 선진국에선 소리없는 경쟁이 불붙고 있다. 우리에겐 아직 개념조차 생소한 용어지만 피지옴이야말로 포스트 지놈 시대 우리가 가장 역량을 기울여야 할 차세대 주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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