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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게르만족의 이동'독일]東쪽 젊은이들, 일자리 찾아 '西로 西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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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독일이 통일된 지 올해로 12년. 이제 독일 국민들에게 통일의 감격과 환희는 까마득한 옛일이 됐다. 단지 '통일 기념일'로 하루 쉬는 10월 3일, 각종 행사를 통해 그날의 기억을 되살릴 뿐이다. 특히 경제사정이 안 좋은 동독지역 주민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곧 서쪽 형제들처럼 잘 살게 되리라던 꿈은 여전히 꿈일 뿐이다. 이 때문에 한때 주춤하던 서쪽으로의 이주행렬이 다시 늘고 있다. 일자리와 보다 나은 삶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현대판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취재했다.

편집자

지난주 옛 동독의 대표적 공업도시 켐니츠를 찾았다. 인구 26만명으로 드레스덴·라이프치히에 이어 작센주에서 셋째로 큰 도시다. 동독 시절 '카를 마르크스 슈타트'로 불리다 통일 후 본명을 되찾은 곳으로 자동차·기계·전자산업의 중심지다. 멀리 고속도로서부터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공장 굴뚝이 공업도시임을 말해 준다. 다른 옛 동독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크레인을 이용한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중심가를 지나 한적한 주택가에 이르자 여기저기 빈집들이 눈에 띈다. 건물이 칙칙하고 낡은 데다 유리창들은 대부분 깨져 있다. 습랭한 바람 속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낙엽 탓인지 더욱 스산한 느낌이다.

"빈집이 많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죠. 도심에서 주거환경이 좋은 주변 녹지대로 옮기는 사람도 있지만 아예 서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켐니츠 경제개발공사(CWE) 소장인 베른트 랑게 박사의 설명이다.

통일 전 켐니츠의 총 피고용자수는 9만3천명에 달했으나 지금은 3만명에 불과하다. 동독 시절 '실업률 0%'를 유지하기 위해 각 국영기업들은 정원의 2∼3배에 이르는 인력을 고용했었다. 현재 켐니츠에 남은 근로자들은 폴크스바겐·지멘스·IBM 같은 최첨단 회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통일 전에 비해 숫자는 훨씬 적다. 대충 그 차이 만큼 서쪽으로 이주했다고 보면 된다.

"통일 후 꾸준히 늘기 시작한 서독 이주가 1996년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한해 6천8백여명이 켐니츠를 떠나 서쪽으로 이주했지요. "

주민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서쪽으로 가는 이유는 뻔하다. 우선 일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지난 9월 현재 옛 서독 지역의 실업률은 7.4%였지만 옛 동독 지역은 16.9%에 달했다. 그나마 취업자의 소득 수준도 서쪽의 70∼80%에 불과하다.

특히 젊은이들의 이주가 많다. 일자리도 문제지만 문화생활이나 여가를 즐길 기회가 서쪽에 비해 월등히 적기 때문이다. 서독 이주자의 42%가 한창 혈기왕성한 18∼30세의 청년층이다. 이로 인해 동독 지역의 인구 구조는 기형적으로 변했다. 18세에서 30세까지의 젊은층이 전체의 15%에 불과해 산업인구의 노령화가 시급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젊은 층의 이탈 현상을 막기 위해 켐니츠시는 켐니츠 공대 등 대학과 이 지역 기업들간 산학협동을 강화하고 직업훈련 교육을 확대하고 있다. 최근 서쪽으로의 이주가 그나마 다소 준 것은 이같은 노력의 결과다. 사정은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옛 동독 지역의 각 주정부와 지자체들이 젊은이들의 서쪽 이주를 막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선 우선 손쉬운 중소기업 창업에 주정부나 중앙정부의 지원이 지금보다 늘어야 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옛 서독이나 외국기업의 직접투자 외엔 달리 묘안이 없다.

그렇다고 동독 기업들이 노동력 부족 현상을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하는 수 없이 동유럽 각국의 값싼 노동력을 필요에 따라 쓰고 있다. 이 때문에 동유럽 등지로부터의 인구 유입이 크게 늘고 있다. 독일 통계청이 밝힌 지난해 외국인 이주민수는 17만8천명으로 통일 직후인 91년의 6배에 달한다. 이로 인해 각종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불법 체류 노동자들이다. 지역적으로 가까운 폴란드나 체코·유고슬라비아 출신 노동자들 수십만명이 불법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독일 정부는 파악하고 있다. 이들은 담배나 마약 밀수에도 손을 대고 있다. 또 네오 나치 등 극우파들이 이들을 공격하는 일이 잦아 동유럽권 주민의 유입은 이래저래 독일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 오는 2004년부터 이들 동유럽 국가를 포함해 10개국이 유럽연합(EU)에 가입, 통행이 자유로워지면 불법 체류는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결국 동·서독의 경제 및 생활수준이 같아져 진정한 통일을 이룰 때까지는 21세기판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그 시기를 2010년께로 보고 있다. 물론 그 이후에도 빵을 찾아 서쪽으로 향하는 '슬라브족의 대이동'은 계속될 것이다.

jsyoo@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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