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로'인류 족보'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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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1면

먼 옛날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어디를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을까. 올 초 아키히토 일본왕은 일본 역사서의 기록을 들어 "스스로 백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는데 과학적인 증거는 있는가. 또 현생 인류의 조상은 언제 어디서 생겨났나.

인류와 민족의 기원을 따지는 이런 문제들에 대해 전통적인 고고학·인류학자들은 화석과 유물, 언어 등에서 답을 찾았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이 발달하며 화석이나 유물보다 DNA가 인류와 민족의 기원을 더 잘 알려줄 강력한 증거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생물과학협회 초청으로 최근 방한한 스반테 파보 독일 막스플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장은 "사람의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에는 인류·민족의 기원에 대한 정보를 가진 DNA가 있다"고 말한다.

보통의 DNA는 세대가 지남에 따라 부모의 것들이 섞여 복잡하게 변하지만, 미토콘드리아와 Y염색체의 일부 유전자는 거의 변하지 않는다. 미토콘드리아의 유전자는 어머니로부터, Y염색체는 아버지로부터만 물려받아 뒤섞임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어쩌다 돌연변이가 일어나 하나 둘 정도가 변할 뿐이다. 따라서 같은 민족끼리는 미토콘드리아나 Y염색체의 DNA가 거의 같다.

또 여러 민족 간에 DNA의 유사성을 살피면, 가까운 친척인지 먼 친척인지 하는 '근연 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사촌은 아버지 대에서, 육촌은 할아버지대에서 갈려나왔듯, DNA가 많이 다른 두 민족은 더 먼 옛날에 관계가 끊어진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전체 민족 간에 이런 근연관계를 파악하면, 종내에는 현생 인류가 언제쯤 공통 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게 진화인류학자들의 생각이다.

이렇게 유전자로 분석한 민족간 근연 관계는 언어를 바탕으로 해석한 것, 그러니까 언어에 유사점이 많으면 서로 가깝다는 가정을 토대로 만들어 낸 민족 관계와도 잘 맞아떨어진다.

미토콘드리아·Y염색체 DNA 분석의 위력은 알프스에서 얼어붙은 미라 상태로 발견된 '설인(ICE MAN)' 논란을 잠재움으로써 명확히 드러났다.

1991년 9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지대의 알프스 산맥에서 미라 한 구가 발견됐다. 방사선 연대측정 결과 약 5천년 전의 시체로 판명됐지만, 누군가 남미의 미라를 옮겨다 알프스의 눈 밑에 묻은 것이라는 조작론이 끊이지 않았다.

95년 영국 옥스퍼드대 연구진이 설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한 결과 유럽인이 분명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의 DNA는 현재의 유럽인과 거의 차이가 없었다. 연구진은 나아가 영국 남부지방의 경영 컨설턴트인 마리 모슬리라는 여인이 설인의 후손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런 결과들을 통해 DNA가 인류의 계보를 탐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떠오르자, 90년대 후반 들어 인류학자와 분자생물학자들은 전세계 민족들의 DNA를 수집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유전자를 비교해 현 인류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각 민족들이 언제, 어떻게 갈려 나왔는지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류의 공통 조상은 10만∼20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나타나 전세계로 퍼졌다. 화석으로 발견된 2백만년 전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나 50만년 전의 베이징원인, 30만년 전의 네안데르탈인 등은 모두 멸종됐고 새로운 종이 지금의 인류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97년 일본 국립유전학연구소는 일본 민족의 원류를 찾는 미토콘드리아 DNA 연구를 했다. 그 결과 일본인의 상당수가 한국인과 비슷한 유전자를 갖고 있으며, 중국의 한족과는 별 관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미토콘드리아 DNA의 돌연변이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말해 줬다.

국내에서는 최근 단국대 김욱(생물학과)교수가 주변 민족들의 Y염색체 DNA를 비교,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몽골 등 북방 계통보다 중국 남부의 먀오(苗) 족과 더 가까운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민족이 북방 스키타이 계통이라는, 청동기 유물 등을 근거로 한 종래 고고학의 해석과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김교수의 연구는 민족별로 20∼1백개의 DNA 표본만을 조사한 것이어서 정확한 결론을 내리려면 조사 표본을 늘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옥스퍼드대 브라이언 사이키스(분자의학과)교수의 연구에서는 노르웨이 북부의 사람들이 우리와 비슷한 유전자 서열을 갖고 있는 것으로 확인돼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권혁주 기자 woong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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