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올해 한국 방문 힘들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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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언제든 환영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13일 발언으로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한국 방문이 다시 한.일 간의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일왕의 한국 방문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 일제 침략에서 비롯된 과거사 문제를 상당히 해결하는 종착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13일 밤 "현재 양국 관계는 좋지만 황실의 일정이 꽉 차있어 그럴 단계는 아직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 관계자도 "양국 간에 일왕의 한국 방문을 협의한 일이 없고, 그럴 예정도 없다"고 확인했다.

우선 일왕의 스케줄상 어렵다. 일본정부 관계자는 "천황의 외국 방문은 관행적으로 2~3년 전 목적지가 결정되는데, 올해는 이미 방문지가 노르웨이로 정해진 상태"라고 말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취임 후 매년 한차례만 외국 방문길에 나섰다. 두 차례 외국 방문한 94년만 예외였다.

또 일왕의 방한은 아직 시기 상조란 것이 양국 관계자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일왕과 가까운 일본측 관계자는 "천황은 아버지 대에 청산하지 못한 과거사를 자신의 대에선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지만 천황의 한국 방문은 본인의 희망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양국간 정치적으로 풀어나갈 문제"라고 말했다.

일본정부가 가장 우려하는 것은 한국의 국민감정이다. 만약 한국 방문기간 중 반대시위가 극심해지고, 혹시 불상사라도 생기게 되면 양국 우호는커녕 오히려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부담감이 크다. 경우에 따라 총리가 사퇴해야 하는 상황에까지 이를 수도 있다.

2002년 한.일 공동 월드컵 때도 한국은 일왕을 초청했다. 그러나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왕족인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부부가 왕족으론 처음 공식방문했다. 아키히토 일왕은 92년 중.일 국교 수립 20주년을 맞아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일 외교소식통은 "한국과는 상황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와 미야자와 기이치 등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수년간 추진했던 사안"이라며 "공산당 체제인 중국에선 반대시위를 억누를 수 있을 것이란 믿음이 있었지만 민주화된 한국은 상황이 다르다"고 말했다.

왕실과 가까운 한 관계자는 "일왕의 방한이 가장 적극적으로 검토된 때는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이었다"면서 "당시는 군사정권이어서 경호 문제에 대해선 자신감이 있었지만 일왕이 독재정권을 지지한다는 인식을 줄 가능성이 있어 단념했다"고 말했다.

또 "일본 내에선 한반도가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만 방문하는 것은 완전한 과거청산이 안 된다는 의견도 많다"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정계에서는 올해 중 왕세자의 방한이 가능하지 않느냐는 의견은 있다. 그러나 한국정부 관계자는 "왕세자의 방한도 아직 양국 간에 논의된 적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도쿄=예영준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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