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38회 건보통합.재정파탄> 건강보험 4조 적자… DJ '無言의 진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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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생각도 대비도 못했던 의료대란에 속수무책이다가 간신히 고비를 넘겼지만, 어쨌든 DJ 정권은 2000년 7월 1일에 과거 어떤 정권도 하지 못했던 (또는 안 했던) 두 가지 의료 개혁을 단행한 셈이었다.

하나는 의약분업. 또 하나는 건강보험통합(직장건보와 지역건보를 통합한 것. 2000년 7월 국민건강보험법을 시행하며 의료보험은 건강보험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의약분업은 1984년 전두환 대통령 시절 목포지역에서 첫 시범사업을 해본 후 16년 만이었다. 건보통합은 80년 천명기 보사부 장관이 全대통령에게 첫 보고한 후 20년 만이었다.

어느 정권에서나 툭하면 불거지던 민감한 이슈였고, 대선 때마다 들썩거린 공약 대상이었던 의약분업·건보통합 두 가지 모두가 결국 DJ 정권에서 '실현'됐다는 것은 과거 정권과 비교해 어떤 배경과 의미를 갖고 있을까.

먼저 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회고.

"81년 보사부 담당과장일 때부터 나는 줄곧 '(의보)통합론자'다. 77년에 처음 의료보험을 도입했다지만 당시는 근로자 5백명 이상의 직장만 대상이었고 지역의보인 농어촌은 88년에야 시작됐다. 농어촌 시범사업을 해 본 것이 81년이었는데 그때 담당과장이었던 나는 '농어촌 혼자로는 도대체 안되겠다. 형편이 좋은 직장의보에서 남는 돈으로 형편이 어려운 지역의보를 도와주어야만 전국민의료보험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82년 당·보사부가 全대통령에게 통합론을 보고했지만 全대통령은 '보류' 결론을 냈다. 이후 보사부 안에서 '통합론자 청소'가 벌어져 나도 83년 2월에 불명예 퇴직을 당했다."

이에 대한 김종대 전 복지부 기획관리실장(현 경산대 객원교수)의 회고를 들어보자. 그는 의보통합을 줄곧 반대하다가 99년 6월 19일 차흥봉 당시 장관에 의해 기획관리실장에서 직권면직된 '조합론자'다.

"82년 11월 2일, 이종찬 민정당 원내총무가 김정례 보사부 장관과 함께 全대통령에게 의료보험 일원화 보고를 했다. 나는 청와대 보사담당 행정관이었다. 보사부가 작성한 보고서의 내용은 이랬다. ▶전 국민 의료보험을 빨리 실시하려면 봉급생활자·농어민·도시자영업자를 통합관리해야 함. 봉급생활자 의료보험의 남는 돈을 활용해야 정부 재정 부담이 없기 때문 ▶의보를 통합해야 정부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면서 잘 사는 조합이 못사는 조합을 지원해 사회연대·소득 재분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음. 보고가 끝나자 대통령은 윤성태 비서관에게 청와대 검토의견을 물었다. 검토자료는 내가 만들었는데 '통합 불가'였다. 이유는 ▶근로자·농어민·자영업자의 소득 파악률이 크게 다르므로 한 잣대로 의료보험료를 부과할 수 없음▶통합을 하면 오히려 근로자·농어민·자영업자 사이의 형평을 해침 ▶통합 후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이 국가가 개입하게 돼 되레 정부 재정부담이 크게 늘어남. 조합별 '내 돈' 의식이 없어져 덜 걷고 더 많이 쓰게 되므로 ▶지금은 조합별로 알아서 보험료를 올리거나 내리는데 통합 후 국가관리가 되면 추곡수매가처럼 적기에 보험료를 올릴 수 없게 됨. 여기까지 다 듣고 난 全대통령은 '비서실 말이 다 맞는 거 아니요. 당에서 공부 좀 해요 '라고 했다. 이후 통합론은 쑥 들어갔다."

차흥봉의 회고.

"통합론자들을 몰아낸 후 보사부는 계속 조합론자들로 채워졌다. 그러다 86년 이른바 3저 호황 때 全대통령이 기획원에 복지대책을 지시해 의보확대가 거론되면서 다시 통합론이 나왔다. 이것이 87년 대선 때 민주화 열풍과 맞물려 재야·노동계·농어민·영세민·사회단체 등이 가세하면서 통합론은 민주화운동에 편입돼 버렸다."

김종대의 회고.

"노태우 정권 초기 여소야대 상황에서 의보통합은 계속 핫이슈였다. 그러다 89년 3월 야3당인 민주·평민·신민주공화당은 의보통합 법안인 국민의료보험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이튿날부터 도하 각 신문들은 기사·사설을 통해 소득이 노출되는 임금근로자들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문제점들을 지적하고 나섰다. 결국 盧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 의보통합을 막았다."

이제 김용익(서울대 의대 의료관리학교실 교수)의 회고를 들을 차례다.

"92년 대선 때 의보통합·의약분업 등이 다 들어있는 보건의료분야 대선공약안을 만들어 각 당에 세일즈했다. YS당(민자당)은 거부했으나 DJ당(민주당) 정책위의장인 이해찬 의원은 수용했다. 그게 DJ 대선공약에 거의 다 들어갔다. 우리 안이 대선공약에 첫 반영된 케이스다. 그러나 DJ는 낙선했고, 우리는 94년에 의보연대(의료보험통합과 보험적용 확대를 위한 범 국민연대회의)를 출범시켰다. 참여연대·경실련·인의협·민주노총 등이 다 참여했다. 당시엔 그것도 '반체제'였다."

이처럼 10년 넘게 대통령 또는 대통령후보의 보류(전두환)·거부권 행사(노태우)·낙선(김대중) 속에 떠돌던 의보통합이 드디어 법으로 확정돼 시행시기까지 잡히는 것은 역설적으로 의보 통합에 대해 별 생각이 없던 YS 때다. 왜일까.

김종대의 회고.

"문민정부에서도 의보통합 논의가 있긴 있었다. 농어촌발전위원회에서 의보 통합을 다시 건의했지만 결론은 역시 '아니다'였다. 그런데 97년 대선 때 또다시 여야 가릴 것 없이 선거전략으로 의보통합을 들고 나왔다. YS는 신한국당을 탈당, 여당이 없는 상태였다. 신한국당은 DJ가 의보통합을 공약으로 내걸 것이 분명하니 선수를 치자고 법안을 발의했고, 국민회의는 이미 같은 내용의 법안을 발의해 놓은 상태였다. 너무나 정치적인 통합이었다. 정치적 과도기의 여당 부재 상태에서는 누구도 통합을 저지할 힘이 없었다."

DJ가 당선되고 온 나라가 환란 속에 휩쓸려 있던 97년 12월 31일, 여야는 만장일치로 국민의료보험법을 통과시킨다. 의보통합이 처음 거론된 지 17년 만이었다. '환란의 해'가 스산하고 불안하게 저물고 있었다.

해가 바뀌어 1998년.

그해 2월 김용익은 영국에서 귀국하며 복지부 의보통합추진기획단에 1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한다.

당시 분위기를 전하는 김용익의 회고.

"앞서 말했지만 DJ 정권 초기에 의료개혁하면 의보통합 하나뿐이었다. 내가 DJ 정권 정책에 관여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맨날 반체제 소리 듣다가 기획단에 들어가니 다들 엄청 센 사람으로 알더라. 많은 부분은 허상이었지만. 어쨌든 세상이 바뀌는 것을 알 만큼 복지부에서도 전화를 해 오고…."

세상은 과연 바뀌고 있었다.

우선 직장의보와의 통합이 추가됐다. 97년 국회를 통과한 법은 지역의보와 공무원·교원 의보 통합만을 규정하고 있었으나, 98년 초 노사정 1기가 직장의보와의 통합까지도 결정하고 나선 것이다. 재계와 한국노총은 반대했지만 민주노총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었다.

98년 10월 1일부터의 지역의보통합(지역+공무원·교원)은 다소 시끄러웠지만 별 탈 없이 시행됐다. 그러나 99년 하반기 들며 2000년 1월부터의 지역+직장 통합을 앞두고는 한국노총과 직장의보 쪽의 반발이 거셌다.

차흥봉의 회고.

"당시 장관이었던 나는 예정대로 하자는 입장이었으나 민주당·한나라당이 다 연기하자고 나왔다. 2000년 4·13 총선을 앞두고 표를 의식한 것이다. 사실 연기 여부보다는 '소득에 기초한 단일 보험료 부과체계'를 만들기가 힘들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연기의 명분도 '지역의보 가입자들의 소득파악이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비록 단일 보험료 부과가 어렵긴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의보통합을 통해 사회연대를 실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2000년 7월 1일부터의 지역+직장 관리조직 통합은 직장건보 노조의 거센 스트라이크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시행됐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노조반발이나 관리통합 강행이 아니었다. 지역+직장 재정통합을 앞둔 건강보험재정이 2001년 초부터 막대한 적자의 수렁 속에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해의 의료대란 속에 복지부 장관은 차흥봉에서 최선정으로 바뀌어 있었다.

최선정의 회고.

"의료대란을 간신히 진정시켜 놓고 '이제는 보험재정이다'하고 있었다. 2001년 연두 업무보고 때도 보험재정에 가장 역점을 두어 보고했다. 결국 보험료 인상밖엔 길이 없으나 이걸 먼저 하면 여론이 나쁠 터이니 감기 같은 소액진료는 본인부담을 늘린다는 등의 자구책을 먼저 시행하겠다는 것이 골자였다. 당시 추정해 보니 2001년 한해에만 약 4조원의 재정적자가 나게 돼있었다. 의약품 실거래가 제도에 따른 수가인상 18.8%, 의약분업에 따른 수가인상 9.2%, 의약정 타협 때의 원칙이었던 수가현실화 13.58% 등이 누적된 데다 의약분업 후 고가약 처방이 늘어나는 등의 변화가 있었고, 건보통합 과정에서 직장건보 쪽이 어차피 넘겨줄 돈이니 다 써버리자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발생한 것이 다 겹친 결과였다. 따지고 보면 상당부분 그간 음성적으로 지불하던 것이 양성화된 것이었다."

그러나 여론은 그간의 의약분업·건보통합 과정과 고충을 다 이해해 줄 만큼 너그러울 수가 없었다. 의료대란 속에 큰 고통을 겪은 게 엊그제인데 이번엔 '재정파탄'이라니.

너그러울 수 없기는 DJ도 마찬가지였다.

연일 각 언론이 '건보재정 파탄'을 크게 다루던 2001년 3월 21일 오전 국무회의.

DJ는 이날 평소와 달리 아무 지시나 마무리 언급도 없이 회의장을 떠났고 각 언론은 이를 '심상치 않은 무언의 질책'으로 보도했다.

최선정의 회고.

"더 이상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한동 총리와 한광옥 비서실장에게 사임 의사를 밝히고 오후 4시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내가 그만두면서 이야기하면 그거야 신문에 있는대로 다 날 것 아니겠는가하는 생각이었다."

이날 최선정이 '마음 먹고' 한 기자회견 내용의 요지는 이렇다.

"(전략)의료분야에서 50년 역사상 가장 큰 변혁을 이뤘다. 그러나 저수가·저급여·저부담 정책을 유지해오며 누적된 모순이 있었다. 정책당국자는 그간 싸고 양질의 의료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하겠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허위고 사기다. 제값을 치르지 않고 서비스나 재화의 품질을 확보할 수 있는가. 의료개혁은 누가 해도 반드시 해야 할 백년대계다. 내가 책임을 통감하고 사임하지만 더 이상의 땜질 처방으론 안된다. 모순구조가 누적돼 한꺼번에 폭발하면 큰 고통이 따른다.(후략)"

이제 의약분업은 실시한 지 2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의약계나 환자들의 불평 불만은 여전하다.

건보통합도 이뤄졌지만 아직까지는 관리조직 통합일 뿐 '걷은 보험료를 섞어서 함께 쓰는' 재정통합은 지난해 한나라당의 발의로 여야가 합의, 2003년 7월부터로 미뤄놓은 상태다.

DJ 정권의 의약분업·건보통합은 여전히 '미완(未完)의 개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팀장:김수길 전문기자

기자:이정재·정경민·이상렬

djnomic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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