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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철학'도 없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한때 언론계에 몸 담았다가 정치에 입문한 국회의원들도 비판 받아야 할 때가 됐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나타난 '철새 이동' 현상이 비록 권력을 좇는 정치 시장의 한 단면이라 할지라도 이제는 마냥 그렇게 봐주기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다. 언론이 이른바 일부 언론 출신 정치인들의 그런 행위를 다루는 시각도 너무 무르다. 너무 천편일률적이고 너무 자기 중심적이다.

이합집산과 사분오열 속에 몇 의원들은 남보다 빨리 '정몽준 신당'으로 옮겼고, 민주당에서 한나라당으로 이동했다. 어느쪽에 붙는 게 유리한지 장삿속 따지는 데 단연 앞섰다. 때문에 충성과 정통을 걷어차고 배반과 이단을 되풀이하는 이들을 지켜보는 독자들의 비판은 따갑다. "야-저 사람들이 너희들 선배나 동료랍시고 그냥 봐주는거냐. 게는 가재 편이라더니. 다른 분야 출신들이 너희들 처럼 배신을 밥먹듯 했으면 아마 반쯤 죽여 놓았겠지." 이런 비아냥은 현장에서 뛰고 있는 기자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현직 언론인들도 왠지 주눅 들고 어깨마저 움츠러들게 한다.

16대 국회의원들의 직종을 보면 정치인 출신 다음으로 언론인이 제일 많다. 지역구의 경우 전체 227명의 의원 중 34명이 언론계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비판의식이 강하고 상대적으로 청렴하며 국민적 신뢰감을 얻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국회에 등원했다. 그들의 활발한 입법활동은 권력에 편입되기 위해 언론계의 신분을 활용했다는 비판을 잠재웠다. 그러나 권력 이동기에 나타난 일부 의원들의 '배신의 정치'에서 그들의 행동이 유별나고 유치하며 또 창피하게 여겨졌던 것은 바로 언론인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과거 독재정권이 그랬던 것처럼 이언제언(以言制言)용으로 국회 등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정치 장학생'도 아니다. 21세기에 맞는 정치와 사회개혁을 위해 국회의원이 됐노라고 강조해온 인물들이다. 그런데 몇달 전 혹은 1년 전이나 2~3년 전 각당의 주요 직책을 맡고 있을 때의 자신의 말과 행동을 완전히 뒤집는 일이 거푸 일어나고 있다. 어떤 정책에 대한 찬성이 반대로 바뀔 때 또는 어떤 인물에 대한 비판이 지지로 바뀔 때 나름대로 논리가 세워져야 하고 국민에게도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에겐 고개를 끄덕여줄 만한 논리가 없다. 정치활동에서 배반과 이단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국회의원에겐, 더구나 언론 출신의 경우엔 본인의 가치판단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 오로지 권력과 편안을 좇고 있으며 기회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배신이 '거스를 수 없는 역사의 대세'라는 말은 그들에겐 너무 거창한 말이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도피처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정보화 시대를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맞고 있다. 그들의 과거 모든 행적은 꼼꼼히 기록돼 있고 누구나 열람할수 있게 만들어지지 않았는가. 무원칙한 정치행각과 변절의 역사도 읽혀지고 있지 않는가.

그들이 기자였던 시절에 기사를 통해 당시의 철새 정치인들을 어떻게 비판했는지를 보라. 그들이 신문·방송을 통해 우리나라 정치 시스템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주장해 왔는데 지금은 어떠한가. 그래도 언론 출신 정치인들은 다른 직종의 경우보다 뭔가 달라보이기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건 몇 의원들의 재빠른 변절이다. 지금 언론 현장에서 정치 쪽으로 슬며시 발을 내밀고 있는 인물들이 그들을 학습한다면 이는 언론계를 위해서도 비극이다.

언론 출신 일부 국회의원들이 정치시장에서 처량한 신세가 돼가고 있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어떤 철학과 정치적 신념이 있어 당적을 바꾼다면 의원직을 사퇴하고 재선거를 통해 유권자들의 심판을 받을 수 있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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