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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은 ‘애국노인’ 마상보 칩거 장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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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호 29면

1929년 겨울 정·관계와 학계 인사들이 뤼야탕(綠野堂)에 칩거 중인 마상보(앞줄 왼쪽 둘째)를 방문했다. 마상보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건 원로 대접을 받았지만 권력을 행사한 적은 없었다. 김명호 제공

마상보(馬相伯)는 1840년 강보에 싸인 채 세례를 받았다. 어린 시절 천주교와 천문학을 혼동했다. “하늘 천(天)자 때문에 해가 지면 하늘만 쳐다봤다.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일기에 적었다가 꾸중을 들었다. 상하이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던 학교가 있었다. 열두 살 되는 해에 입학해 프랑스어, 희랍어, 라틴어, 신학의 기초를 닦았다. 18년 만에 신학박사 학위와 사제서품을 받았지만 돈 떼먹고 시치미 떼는 프랑스인 신부를 두들겨 패는 바람에 신학, 수리학, 천문학 관련 서적 100권만 펴내고 교단에서 쫓겨났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7>

마상보는 외교관으로 변신했다. 22년간 일본·이탈리아·미국·프랑스 등에 주재하며 견문을 넓혔다. 1882년 임오(壬午)년 여름, 조선에 군란이 발생했다. 북양대신(北洋大臣) 리훙장(李鴻章)은 난을 평정하기 위해 수사제독(水師提督) 딩루창(丁汝昌)을 파견하며 마상보를 외교통상 고문으로 딸려 보냈다. 위안스카이라는 군관이 마를 잘 따랐다. 나이도 자식뻘이었다. “젊은 사람이 말귀를 잘 알아듣고 사람의 의중을 읽을 줄 안다. 동작도 민첩하다”며 볼 때마다 흡족해 했다.

하루는 위안스카이가 게 9마리를 사 들고 찾아와 조선에 계속 남게 해주기를 청했다. 마는 즉석에서 위안을 조선 주재 상무담당관(駐朝商務專員)으로 추천하는 편지를 리훙장에게 보냈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위안은 마의 제자로 자처했다.

시간이 갈수록 마상보는 위안스카이에게서 야심가의 모습을 발견했다. 위안도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땅을 차고 튀어 올라 구름을 뚫고 싶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마는 짓궂은 데가 있었다. “간단하다. 궁중에 있는 환관들부터 구워 삶아라. 그들을 통해 조정의 고관들과 인연을 맺으면 관직이 점점 올라갈 수 있다. 거짓말도 잘해야 한다. 진실을 말하겠다면 차라리 네 무덤을 파라. 약속을 많이 하되 지킬 필요는 없다. 애쓰는 척만 하면 된다. 진짜 능력과 실력은 고관 자리를 꿰찬 다음에 발휘해라.”

마상보는 장난 삼아 한 말이었지만 평소 농담을 진담처럼 하고, 진담을 농담처럼 하던 위안스카이는 빈말로 듣지 않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금을 마련해 환관들을 매수했다. 정 급하면 “내가 당장 죽더라도 네게 빌린 돈값은 할 거다” 라며 기녀들의 치마폭에 시(詩)를 써주곤 했다. 옷장 구석에 위안스카이의 붓글씨가 담긴 속옷 한두 벌은 있어야 제대로 된 기녀 축에 들었다. 결국은 서태후의 눈에 들었고 서태후가 가장 신임하던 룽뤼(榮祿)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가는 곳마다 “관운을 타고 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마상보는 65세 때 교육계에 투신했다. 남양공학(교통대학 전신)에서 퇴학당한 학생들을 모아 푸단(復旦)대학을 설립하고 민주와 종교의 자유를 제창하는 글을 연일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대총통에 취임하자 마상보를 검찰과 법원을 감독하는 평정원(平政院) 평정과 총통부 고문에 임명해 명사들을 끌어들이려 했다. 차이위안페이 등 마의 제자들을 기용하고 툭하면 장남을 보내 잔치를 베풀었다. 마는 회의에도 나오지 않았고 자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위안스카이가 제위에 오르려 했을 때 마상보는 “장난 삼아 했던 입방정이 국가에 화를 초래했다. 위안스카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도둑놈”이라며 다른 사람이라면 모가지가 백 개가 있어도 모자랄 글을 수없이 발표했다. 위안스카이는 “청년 시절 조선에서 마상보를 만난 덕에 운명이 바뀌었다”며 모른 체했다.

1931년 일본 관동군이 만주를 점령했다. 마상보는 4개월간 12차례에 걸쳐 국난 극복을 호소하는 방송을 했다. 중국인들은 노(老)청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가 살던 투산만(土山灣)의 뤼예탕(綠野堂)은 항일의 정신적 성지였다.

1939년 가을, 에드거 스노의 책을 들고 온 중공 지하당원에게 “나는 한 마리의 개였다. 백 년간 짖어대기만 했지 사람을 깨우지는 못했다”는 말을 남기고 피난지 월남에서 세상을 떠났다.

70년 후 상하이 엑스포를 준비하던 중국인들은 마상보가 칩거하던 곳에 ‘중국관(中國館)’을 세워 ‘애국노인(愛國老人)’을 위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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