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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담장이 낳은 예술가, 47세에 감옥서 ‘요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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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29면

1950년 8월 웨쥐(越劇) 판파이(范派)예술의 창시자 판루이쥐안(范瑞娟·앞줄 오른쪽 둘째), 국가 1급 연기자 푸취안샹(傅全向·앞줄 왼쪽 둘째)과 함께 중난하이로 저우언라이를 방문한 쑨웨이스(앞줄 왼쪽 첫째). ‘의용군 행진곡’ 작사자 톈한(田漢·뒷줄 왼쪽 둘째)과 루쉰(魯迅) 부인 쉬광핑(許廣平·뒷줄 오른쪽 첫째)의 모습도 보인다. 김명호 제공

중공 1세대 지도자들의 딸 중에는 재녀(才女) 소리를 듣는 사람이 많았다. 덩샤오핑과 뤄루이칭(羅瑞卿)의 딸은 부친의 회고록을 펴내 세상을 놀라게 했고, 마지막 보황파(保皇派) 타오주(陶鑄) 딸 스량(斯亮)은 아버지와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글로 중국인들을 감동시켰다. 건국 공신 예젠잉(葉劍英)의 둘째 딸도 중국의 가장 권위 있는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해 재능을 인정받았다. 이들의 활동은 한 차례로 끝났다. 전문성과 예술성에 한계가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76>

쑨웨이스는 이들과 달랐다. 영화와 무대예술을 가장 중요한 선전도구로 여겼던 스탈린 시대에 모스크바 희극학원에서 희극과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한 최초의 중국인이었다. 문혁 시절 비참한 최후를 마쳤지만 붉은 담장이 배출한 유일한 전문가이자 진정한 예술가였다.

1946년 가을 옌안으로 돌아온 쑨웨이스를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은 연극애호가 장칭이었다. “너는 저우언라이의 딸이고 나는 마오쩌둥의 부인이다. 우리를 흠집 내려는 사람에게 같이 대응하자”며 손을 내밀었다. 쑨은 “전쟁에 승리하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며 묵살했다.

쑨웨이스는 자유주의자 기질이 강한 예술인들, 특히 2류당 사람들과 가까웠다. 신중국 선포 직전인 49년 9월 부다페스트에서 딩충(丁聰)과 함께한 쑨웨이스.

쑨웨이스는 토지개혁운동에 참여하고 해방군 점령지역의 대학에서 영화와 희극이론을 강의했다. 최전선을 찾아다니며 소련 현대희극도 선보였다. 예술성과 선전효과가 뛰어났다. 뤄루이칭은 “쑨웨이스는 당이 키워낸 첫 번째 홍색 전문가”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신중국 설립 후 중국의 연극과 영화계는 옌안에 있던 사람과 국민당 통치구역에서 활동하던 연예인들이 뒤섞여 복잡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다. 쑨웨이스는 청년예술단 총감독과 부단장을 겸하며 연기자들을 휘어잡았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집무실도 마음대로 출입했다.

49년 12월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쑨웨이스의 운명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마오는 난생처음 떠나는 외국여행에 장칭을 데리고 가지 않았다. 장이 아무리 졸라도 “스탈린이 속으로 흉 본다”며 허락하지 않았다. 쑨은 기밀을 다루는 기요비서 겸 통역팀 조장으로 마오를 수행했다.

마오가 소련에 머무는 동안 온갖 소문이 나돌았다. 장칭은 젊은 시절 오해받을 행동을 많이 해 본 사람다웠다. 쑨을 만날 때마다 모스크바행 열차에서 있었던 일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대답은 한결 같았다. “국가의 기밀사항이라 말해줄 수 없다.”

문혁의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67년 장칭은 린뱌오의 부인 예췬과 손을 잡았다. “네 원수는 내가 갚아주마. 내 원수는 네가 처리해라.” 중앙군사위원회 판공청 주임이었던 예췬은 30년 전 린뱌오와 쑨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쑨의 남편을 간첩혐의로 체포하고 가택수색에 나섰다. 마오, 린뱌오, 저우언라이 등과 주고받은 편지와 사진들이 다량으로 나왔다. 연애편지에 가까운 것도 많았다. 장칭은 저우언라이가 쑨에게 보낸 편지를 들고가 저우를 몰아붙였다.

중요 인물의 체포는 저우언라이의 서명이 필요했다. 저우는 진땀을 흘렸다. 이날 장칭은 국가주석 류샤오치의 부인 왕광메이(王光美)와 저우의 동생에 대한 체포지시서도 덤으로 받아냈다.

이듬해 3월 1일 군이 관리하던 베이징 공안국에 끌려온 쑨웨이스는 7개월간 얻어 맞기만 하다가 47세로 세상을 떠났다.

쑨웨이스는 “열 명의 군자에게 죄를 지을지언정 한 명의 소인에게 죄를 지어서는 안 된다”는 말만 명심했어도 피할 수 있는 화를 자초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고 똑똑한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경구 따위를 익힐 기회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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