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核은 협상 대상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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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새로이 불거진 북한 핵문제로 각광을 받았던 제8차 남북 장관급 회담이 23일 새벽에 끝났다. 그러나 평양에서 전해진 뉴스는 답답하고 우울한 내용들이다. 남북은 이번에 채택한 공동보도문 1항에서 매우 모호한 표현으로 핵문제를 언급하는 데 '성공'했다. "핵문제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대화의 방법으로 해결하도록 적극 협력한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것을 가지고 "대화에 의한 핵문제 해결을 우리가 주도한다는 의미"라는 '해석'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번 공동보도문에서 언급된 '대화의 방법'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치 않다는 사실이 간과되고 있다.

이 표현은 21일 북의 김영남(金永南)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남의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의 만남의 자리에서 있었던 김영남의 '말'에 기초하고 있다. 김영남의 말은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용의가 있다면 대화를 통해 해결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이었다. 이번 장관급 회담의 타결 결과와 이 결과를 선전하는 정부의 움직임을 가지고 보면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아마도 오는 26일 멕시코에서 열리는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북한 핵문제의 '대화에 의한 해결'을 위해 미국이 '대북 적대시 정책을 철회하라'고 설득하겠다는 생각임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문제는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가 무엇을 뜻하느냐는 것이다.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철회'는 ①주한미군을 철수시키거나 북한에 대한 비적대적·우호적 군대로 임무와 성격을 바꾸고 ②한국을 왕따시키는 가운데 미국과 북한 간에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이로써 1953년의 정전협정을 대체하며 ③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이에 기초한 한·미 안보유대, 그리고 이에 따른 한·미 연합사령부 등 연합작전 체제 및 '작전계획 5027' 등을 폐지하고 ④이를 토대로 미·북 간 국교를 정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요컨대 1953년 휴전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 재발을 막아온 안보의 기둥인 전쟁억지력과 그 장치를 제거하라는 것이다.

이 같은 북측 의도에 대한 우리 정부의 태도가 우리를 답답하고 우울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같은 북측 의도를 읽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읽으면서도 다른 생각이 있어서 모르는 체 하는 것인가. 물론 이라크와 북한을 동시에 군사적으로 상대하기가 힘겨운 미국이 당분간 외교적 대응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의 외교적 대응은 "핵문제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라는 단호한 입장 아래 '외교 및 경제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압박외교로 북한을 고립화시켜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이번 장관급 회담에서 핵문제에도 불구하고 철도·도로 연결과 개성공단 및 이산가족 면회와 북한어장 개방 등에 관해 많은 합의를 도출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의문이 있다. 핵문제 해결 없이 이들 합의들이 원만하게 이행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미국은 한국에 대해서는 햇볕정책에 연연하는 현 정부가 남은 임기 동안 남북대화에서 무엇을 합의하든지 상관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대가와 같이 북이 군사적 목적에 전용할 수 있는 현금지원에 대해서는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면서 그 밖의 대북사업에 대해서도 최소한 속도조절을 종용하리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게 되면 한·미 나아가 한·미·일 간의 대북정책 공조에 균열이 생기리라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 같은 균열이 표면화되는 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에서는 또 한 차례 반미감정이 촉발되고 증폭될 가능성이 있다.

또 그렇게 되면 일부 정치세력이 이를 대선 정국에 이용하려 시도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대선 기간 중 북핵 문제 해결은 팽개쳐진 가운데 대외적으로 한·미·일 대북정책 공조의 균열과 대내적으로 국론분열이라는 이중고를 겪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이야말로 북한의 노림수인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입장에서도 북한의 핵포기는 '협상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 북한은 무조건 핵개발을 포기해야 하고 북한이 말하는 '미국의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 문제는 그 뒤에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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