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네바합의 주역의 北核 진단>"美 북핵 해결 열쇠는 협상 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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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북한 핵 파동의 출발점은 1994년 미국과 북한이 체결한 제네바 합의(북·미 기본합의)다. 제네바 합의의 미국 측 협상대표였던 로버트 갈루치(조지타운대 외교대학원장)당시 북한핵 대사는 이번 사태를 판단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다. 갈루치 전 대사가 당시 빌 클린턴 행정부의 안보팀 멤버였던 로버트 아인혼(당시 국무부 부차관보)국제전략문제연구소(CSIS)선임고문, 커트 캠벨(전 국방부 부차관보)CSIS 부소장과 함께 21일 '북한 핵개발 시인에 따른 현황과 전망'을 주제로 열린 CSIS 세미나에 참석했다.다음은 발언 요지.

◇로버트 갈루치=과거 이라크는 농축 우라늄 계획이 들켰을 때 이라크에 있지도 않은 경수로 발전소의 연료용이라고 둘러댔다. 경수로를 짓고 있는 북한이 그런 식으로 변명을 했다면 그건 말이 된다. 그러나 북한은 그런 변명을 하지 않고, 제네바 합의에 위배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냥 시인해버렸다. 이는 제네바 합의가 그들에게는 불필요하거나 소용없어졌다는 시사다.

김정일(金正日)북한 국방위원장은 북·미 관계 정상화 같은 제네바 합의 조항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이는 괜히 부담만 되지 자신들의 체제 안보를 위한 안전장치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악의 축' 발언 이후 불거지고 있는 미국으로부터의 전쟁 위협을 피할 수 있는 보다 확실하고 새로운 전쟁억지의 틀을 미국에서 보장받으려는 속셈으로 볼 수 있다.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가 문제다. 우선 외교적 압력을 생각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한·미·일 동맹뿐만 아니라 중국·러시아·유럽까지 가세해야 한다. 그동안 추진해온 북한과의 외교적 교섭이나 경제적 지원도 일시 중단하고, 북한에 주는 전력·비료·중유 등의 인센티브도 중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향후 예상되는 북한과의 협상을 위해서다.

일부에서는 제네바 합의가 "사실상 실패했고 오히려 속았다"고 비판하지만 이 합의가 없었다면 북한은 매년 1백㎏(핵무기 30∼40개 제조 가능)의 플루토늄을 생산했을 것이다. 기본합의서는 그 자체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최종 수단이 아니라 향후 절차적 노력에 대한 합의였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효력이 있느냐, 누가 먼저 파기했느냐는 문제는 의미가 없으며 앞으로 그 틀이 어떻게 유지되느냐가 관건일 뿐이다.

그동안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을 성공적으로 막아왔으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특별사찰은 IAEA 규정 제153조 '정보공급' 조항에 의거해 실시하면 된다. 그것은 IAEA의 표준적인 사찰이다. 북한에 대해 의혹이 있으니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사찰을 받으라고 해야 한다. 미국은 또 제네바 합의에 적절한 시점에 제3국으로 보내도록 명시돼 있는 북한의 사용후 핵 연료봉을 빨리 제3국으로 보내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농축 우라늄 및 관련 시설의 해체와 제거, 탄도미사일 개발·수출의 영구적 금지 등도 북한과의 장기적 협상을 위한 사전조건에 포함돼야 한다. 물론 이같은 협상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더 이상 주고받는 식의 협상을 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다른 정치·경제적 혜택과 같은 반대급부도 포함돼야 할 것이다.

크게 보아 현재 미국이 가진 수단은 ▶외교적 협상▶군사행동▶봉쇄정책 등인데 군사행동은 명백한 참사가 예상되고, 봉쇄정책은 그대로 방치하는 문제가 있어 결국 협상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협상은 내용이야 어떻든 94년 당시와 별 차이 없이 북·미 간 상호 의무 이행 형태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로버트 아인혼=북한이 농축 우라늄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징후는 90년대 말부터 있어 왔다. 18개월 전부터 그 의심이 강해졌으며 부시 행정부는 올 여름 최종 확인을 할 수 있었다. 제임스 켈리 국무부 차관보가 북한에 제시한 물증은 관련 설비·재료 등을 구입하려는 단계에서 포착한 증거일 것이다. 즉 북한이 당장 고농축 우라늄으로 핵무기를 생산하는 단계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그 과정은 시간도 플루토늄보다 훨씬 오래 걸린다.오히려 영변 핵 위기 당시 불거졌고 현재도 어딘가에 남아 있을 플루토늄이 훨씬 위험한 대상이다.

제네바 합의는 법률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다. 어느 한쪽이 파기를 선언한다고 파기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북한에 대한 중유 제공과 경수로 건은 정치적 관점에서 봐야 한다.

이번 사안의 진행과정에서 중국은 주요 관건이다. 중국은 그동안 북한에 대해서는 유독 민감한 문제에 개입하거나 대외적으로 압력을 행사하는 모습을 자제해 왔다. 하지만 중국도 북한의 핵 보유를 바란다고 볼 수 없으며, 결국 중국은 오는 25일 미·중 정상회담에서 어떤 형태로든 미국의 희망대로 북한 핵 문제에 개입하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부시 행정부는 향후 북한과의 협상에서 반대급부로 세계은행이나 유엔을 통한 경제적 지원을 염두에 두는 듯하지만 실제로 북한이 가장 바라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공격 위협에서 자유로운 체제 안전 보장이다.

◇커트 캠벨=잘 모르는 사람들이 북한에 대한 군사력 사용을 이야기하지, 실제로 북한 핵 문제와 관련해 군사력은 미국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못된다. 재래식 무기를 지닌 많은 병력이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는 것이 북한의 전략이었던 60, 70년대 수준이라면 미국도 마음놓고 군사력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능하다. 서울은 핵 문제가 불거지기 전인 80년대에 이미 휴전선에 집중 배치된 포화의 볼모가 됐다. 북한도 서울을 볼모로 자신들의 안보를 추구하는 전략으로 바꾼지 오래다. 따라서 이번 북한의 핵개발 시인은 또 다른 보험의 성격이 짙다.

한·미 양국은 북한이 한·미 군사전략을 선제공격 전략으로 오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북한이 군비 증강을 할 것이고, 한반도 긴장이 고조될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은 세계에서 두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국방 전략을 갖고 있지만, 이라크 문제에다 테러와의 전쟁까지 겹친 상황에서 북한 문제까지 강경책으로 밀고나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게다가 북한은 이라크와 주변국 여건도 다르다. 이라크 주변의 중동 국가들은 겉으론 온건책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우리에게 "당장 이라크에 크루즈 미사일을 날려라"고 은밀히 말할 정도다. 반면 한국과 일본은 북핵에 원칙적으로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지만 우리에게는 가급적 대화로 문제를 풀라고 요청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도 이라크라면 몰라도 북한 공격에는 절대 동의할 리 없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joon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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