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박사과정 또 미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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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대 공대 석사과정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인 申모(25)씨는 박사과정 진학을 포기하고 카투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국내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한다 해도 해외 유학파에 밀려 강사 자리 확보도 여의치 않은 데다 취업 전망이 밝지 않아 학업을 접기로 한 것이다.

그는 "사회·경제적으로 인정받는 연구원이 되고 싶다는 환상은 석사과정에 들어온 뒤 얼마 안돼 깨졌다"면서 "졸업장이 취업 보증수표가 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더이상 학업을 이어갈 의욕이 없다"고 밝혔다. 그는 주변 동료들도 다른 대학 치의예과로 편입시험을 준비하거나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申씨처럼 석사과정 수료를 앞두고 박사과정 진학을 기피하는 학생들이 크게 늘고 있다. 이같은 분위기는 2003학년도 서울대 대학원 박사과정 모집에서 최악의 무더기 미달사태로 나타났다. 특히 인문·자연대 등 기초학문 분야의 지원율이 0.5대1 안팎에 이르는 등 극히 저조해 해당 단과대에선 학문 단절의 위기감마저 감돌고 있다.

지난 18일 마감한 서울대 대학원 전기모집 결과 1천1백24명 정원의 박사과정에 9백60명이 지원, 경쟁률이 0.85대 1에 그쳤다. 이 학교 개교 이래 첫 미달사태가 벌어진 지난해 전기 모집(0.9대 1) 때보다 더 떨어진 것이다.

모집단위 18곳(일반대학원 15곳·특수대학원 3곳) 중 9곳만 정원을 채웠다. 그나마 사회대(1.01대1)와 사범대(1.1대1)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7곳은 의학·수의학 계열이나 특수대학원들이었다. 약학대(0.45대1)·농생대(0.5대1)·자연대(0.57대1)·인문대(0.66대1)·공대(0.81대 1) 등 대부분의 단과대가 미달돼 사실상 '지원=합격' 이 가능할 전망이다.

인문대는 언어·종교학과를 제외한 전 학과가 미달됐으며 지원자가 한명도 없는 학과도 두개나 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밖에 자연·농생대도 한두개 학과를 제외하고 전 학과가 미달됐으며 공대도 2백86명 모집에 2백34명이 지원해 지난해에 이어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이밖에 석사과정도 3천66명 모집에 5천2백77명이 지원, 1.72대1에 그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자연대 최재천(생명과학)교수는 "연구실의 중추 역할을 하는 박사과정 학생들이 최근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어 연구작업이 큰 지장을 받고 있다"면서 "국내 박사과정 학생들에 대한 국가 지원책 강화가 절실하다"고 밝혔다.

◇원인=주요 원인으로는 해외유학파에 대한 선호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교수 채용시 외국박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하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을 원하는 학생들도 '교수가 되려면 석사과정만 국내에서 하고 박사는 외국에서 따야 한다'는 인식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2000년 말 현재 서울대 교수 1천4백38명 중 최종학위를 국내에서 받은 사람은 5백53명에 불과했다.

또 서울대 입시관리본부 관계자는 "학부 정원을 축소하고 대학원 정원을 늘리면서도 연구 여건에 대한 질적 개선이 뒤따르지 못한 탓"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최근 이공계 해외 유학파에 편중된 정부·민간장학재단의 지원책도 국내 박사학위에 대한 선호도를 추락시켰다고 지적했다.

한 교육계 인사는 "심화되는 고학력 실업도 박사과정 미달사태의 원인이 됐다"며 "박사학위를 받아도 실업자 신세를 면하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기초학문 분야를 중심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1996년 서울대 박사학위자의 취업률은 93%였지만 이후 꾸준히 감소해 올해 초 87.9%에 그쳤다.

서울대 본부 관계자는 "최근 연이은 미달사태로 서울대가 지향해온 '대학원·연구 중심대학 육성'이란 목표가 무색해졌다. 본부 차원에서 중·단기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창희·정용환 기자

thepla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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