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week& cover story] 외국인이 본 인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인천, 곧 제물포가 본격적으로 세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1883년 개항과 더불어서다. '은자의 나라' 조선이 잠긴 빗장을 풀면서 서구 각국의 선교사.외교관.상인.여행가들이 속속 제물포항을 통해 입국한다. 그리고 이들은 단편적이지만 인천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데 19세기 초엽, 백령도에 상륙했던 영국 해군 장교 배질 홀이 남긴 '조선서해탐사기'가 최초가 아닐까 싶다.

홀 일행이 1816년 9월 1일, 백령도에 상륙해서 본 것은 '갈대에 진흙을 발라 대강 엮은 듯한 40채의 집들과, 얼굴이 구릿빛으로 탄 험상궂고 약간 야만스러워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첫인상이다. 중국을 거쳐 온 홀은 특히 중국 여인들의 전족(纏足)이 신기했던지 조선 여인들의 발은 '중국에서처럼 죄이지 않은 보통 크기'란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홀은 영국으로 귀환 도중 세인트 헬레나에 유배된 나폴레옹을 찾아가는데 '조선은 남의 나라를 침략해 본 적이 없는 선량한 나라'라고 말하자, 나폴레옹이 웃으며 '그런 민족이 세상에 있단 말인가. 내가 다시 천하를 통일한 후 꼭 그 조선이라는 나라를 찾아보리라'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그곳에는 어촌 사람들이 큰 무리의 펭귄 떼처럼 앉아 있었다. 펭귄처럼 하얀 가슴과 검은 머리를 한 그들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바위를 배경으로 느긋하게 우리를 쳐다보는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남자들은 담배 피우는 데 골몰했고 아낙네들은 집에 남아 있었다." 1884년 조선 주차 영사로 온 영국인 윌리엄 칼스의 제물포 사람들에 대한 첫 느낌이다.

서구인들에게 무지와 미개의 모습으로 비쳤던 인천은 결국 그들의 손에 의해 싫든 좋든 각종 개화 문물, 제도의 수입 창구가 된다. 또 그것들의 국내 최초 수용지, 혹은 시행지로서 역사에 기록된다.

김윤식(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