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 공격 앞둔 美의 '北核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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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이 1994년 제네바 합의를 무시하고 지난 수년간 농축 우라늄을 사용하는 핵무기 개발 계획을 비밀리에 추진해왔음을 시인하고 나서자 미국은 고민에 빠졌다.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오는 31일 핼러윈(만성절 전야)에 때맞춰 죽었던 북한 핵이 찾아와 대문을 두드리면서 "trick or treat(과자를 안 주면 장난칠테야)"라고 '협박'하는 상황이라고 썼다. 핼러윈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매년 한번씩 자신이 살던 옛집을 찾아온다고 믿어 이들을 영접하는 서양 풍속이다.

지난 3∼5일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미 국무차관보가 북한이 핵무기 제조를 위해 우라늄 농축에 필요한 고강도 알루미늄 등을 해외에서 들여왔다는 증거 자료를 제시하자 북한은 첫날엔 이를 부인했다가 이튿날 순순히 시인했다. 이와 함께 북한은 세가지 조건들 ▶북한을 선제공격하지 말 것▶북·미 평화조약 체결▶북한의 경제체제 용인을 내걸고 미국이 이를 받아들이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할 의사가 있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켈리 차관보의 귀국 보고를 들은 부시 행정부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대책을 논의했다. 강경파는 북한이 새로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무력 사용을 포함한 강경 대응을 주장한 데 반해 온건파는 제네바 합의를 먼저 깨뜨려선 안된다고 강조하고 평화적 해결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국무부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인 사실이 일부 언론에 알려지자 12일 후인 지난 16일 밤 늦게 공식 발표했다.

북한이 농축 우라늄을 사용한 핵무기 개발에 착수한 것은 97년 무렵이라고 한다.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자 제네바 합의가 깨질 가능성에 대비한 '방지책'을 마련한 것이다. 특히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하자 미국으로부터 공격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핵무기 개발을 서두르는 것 같다. 제네바 합의에 따라 플루토늄 사용은 불가능하므로 농축 우라늄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우라늄을 농축하는 기술이 없으므로 외국에서 들여와야 했다. 뉴욕 타임스는 북한에서 미사일을 수입해온 파키스탄이 기술을 제공했다고 보도했다.

다행스럽게도 미국은 이번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라크 공격이 임박했고, 테러와 전쟁을 치르는 상황에서 새로운 전선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는 이라크와 사정이 다르다. 세계 5위인 1백10만 병력을 보유한 북한군은 재래식 군사력만으로도 한국과 주한미군에 막대한 타격을 가할 수 있다. 군사 전문가들은 북한 공격은 제2의 한국전쟁으로 발전해 쌍방에 수백만명 희생자가 발생할 것이며, 궁극적으로 한국군과 미군이 승리하겠지만 한반도는 폐허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문제는 이라크 공격에 미칠 영향이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는 주된 이유는 대량살상무기(WMD)다. 이라크에는 아직 핵무기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북한은 핵무기 1∼2개를 보유한 것이 기정사실처럼 돼 있으며, 제네바 합의에 따라 그동안 봉인돼 있던 사용후 핵연료를 가공하면 6∼8개로 늘어난다. '더 위험한 존재'인 북한과는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면서 이라크에 대해선 무력 사용을 고집하는 미국의 '이중 잣대'에 대해 거센 비판이 일어날 전망이다. 북한의 핵무기 개발 시인은 미국에 골치아픈 과제를 안겨줬다.

국제전문기자

chuw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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