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고비때마다 密使가'주연같은 조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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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이후락(李厚洛)·장세동(張世東)·박철언(朴哲彦)·서동권(徐東權)·임동원(林東源)….

평양을 찾았던 대통령의 대북 밀사들이다. 정상회담을 위해 뛰었던 조연들이다. 6공 때 박철언 전 정무장관을 제외하면 정권마다 국가 정보기관의 최고 책임자였다.

대북 밀사는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기 위해 대통령이 불가피하게 활용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통일 방안이나 대북 지원의 투명성과 관련해 그때마다 논란의 대상이 됐다.

남북간 밀사 교환은 1972년 5월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평양을 비밀리에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면담하면서 시작됐다. 이어 북한의 박성철 당시 부총리가 같은 달 서울을 답방해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됐다.

5공 때는 장세동 안기부장과 허담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가 정상회담 추진을 위해 밀사 역할을 했다. 許비서는 85년 9월 "각하(전두환 당시 대통령)와의 평양 상봉이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는 金주석의 친서를 갖고 서울을 방문했다. 두달 뒤 張부장과 박철언 당시 청와대 특별보좌관 일행이 평양을 방문했으나 정상회담 성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김영삼 정부 때인 93년에는 밀사가 아닌 특사교환도 논의됐다. 북한 핵위기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가 핵문제 해결을 위해 남북 고위급 회담 개최를 위한 대표 접촉을 갖자고 제의하자 북측은 남북 정상간 만남과 현안 해결을 위한 특사 교환을 역제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93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실무접촉이 진행됐지만 북한 박영수 대표단장의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특사교환은 무산됐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3월 '베를린 선언'에서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당국간 특사교환을 촉구했다.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과 북한 송호경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은 베를린 선언 직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비밀리에 만나 같은 해 6월의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 산파 역할을 했다. 그해 5월엔 임동원(林東源)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정상회담을 사전 조율했다.

최상연 기자

chois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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