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국]'아무나 살해' 낳은 스나이퍼 <저격수> 문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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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우리가 고교생 때 암스트롱·올드린과 같은 우주인을 얘기했다면, 요즘 학생들은 스나이퍼(sniper·저격수)를 이야기한다. 해병대의 전설적 저격수인 해치콕 하사가 베트남에서 사살한 적군 수가 몇명이냐, 또는 레밍턴과 AK-47 라이플 중 어떤 것이 더 정확한가를 두고 교실에서 옥신각신할 정도다."

미국 가정안전협회 간사인 조수아 존슨은 최근 워싱턴 일대에서 잇따르고 있는 저격병식 연쇄 총격사건을 두고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그는 "남자들이 원래 무기를 좋아한다지만 항공모함·전투기·탱크라면 몰라도 스나이퍼는 정말 곤란하다. 원래 속성이 숨어서 쏘는 것인 데다 미국에서는 누구라도 쉽게 총기와 관련지식을 접할 수 있어 이번 사건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앞으로 '카피캣'(모방범죄자)들이 속출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워싱턴 백악관 주변 거리에 줄지어선 기념품 가판대에는 'SWAT'(경찰특공대)는 물론 스나이퍼를 다룬 베스트셀러 소설제목인 '원샷 원킬'(One-Shot,One-Kill)이 적힌 T셔츠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인근 대형 서점에 들러 컴퓨터에 '스나이퍼'를 입력했더니 스나이퍼의 역사, 스나이퍼가 되는 법, 훈련교범, 라이플 값싸게 구하기 등 93종의 목록이 줄을 이었다. 잡지코너에도 마찬가지로 '총기 세계' '훌륭한 사격수' 등 10여종이 꽂혀 있었다.

폭력방지정책센터(VPC)의 톰 디아즈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총기문화는 과거 건국·서부개척 시대에 자기보호를 위해 출발했지만 그동안 스포츠화를 거쳐 지금은 현실도피·과시욕, 반(反)사회를 표현하는 하위문화 수준으로 왜곡·타락했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이 센터는 그동안 인터넷 등을 통해 『도시 내의 저격술』 『산업사회속 반군들의 작전 매뉴얼』 『미국 언더그라운드의 전투훈련 교범』과 같은 책까지 입수했다고 한다.

디아즈 연구원은 "1990년대 초를 고비로 호신용 권총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자 총기생산업자들이 라이플 소총 시장에 눈을 돌렸다. 이들은 전국총기협회(NRA)를 중심으로 뭉쳐 92년부터 '스나이퍼' 같은 할리우드 영화 제작을 지원하고 '레밍턴 톱샷'이나 '스와트' 등 관련 비디오게임을 공동 개발하는 식으로 문화적 미끼를 먼저 뿌렸다"고 말했다. 이같은 마케팅 활동이 주효한 탓인지 현재 미국 내 연간 라이플소총 생산량은 약 1백60만정에 이른다. 93년을 정점으로 권총이 줄어들고 라이플 소총이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픽 참조>

이중 30% 정도만 저격용이라고 추정해도 10억달러 수준의 시장규모다. 여기에다 총탄, 인터넷으로 주로 판매되는 위장복·군화·조준경·야간투시경 등 군장비, 전국 30여곳에 달하는 저격수 전문 민간 훈련·사격장과 각종 출판물을 감안하면 스나이퍼 시장규모는 최소한 연간 20억달러에 달한다고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미 정부는 93년 텍사스주 웨이코에서 저격용 라이플로 저항한 광신도들의 총격사건 이후 잠시 총기규제를 강화하는 듯했지만 매년 정치기부금 순위 1·2위에 오르는 전국총기협회(NRA)의 로비로 흐지부지된 상태다. 다이앤 페인스타인 연방상원의원(캘리포니아·민주당)이 발의한 '저격용 소총 등록·소지 허가제' 법안도 총기규제에 반대하는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2년째 잠자고 있다. 1년 전에는 시애틀의 대표적인 저격용 소총 반대운동가였던 톰 웨일스 변호사가 자신의 거실에서 유리창을 뚫고 날아온 정체불명의 총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워싱턴=이효준 특파원

joon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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