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부.35회 피곤한 개혁-의학분업(1)> DJ 취임초 "다들 싫다는데 의약분업 왜…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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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결국 국민 불편과 부담만 남았다. 이런 의약분업은 안 했어야 했다. 시민단체가 애초 의도했던 취지와 골격은 다 깨져버렸다. 정부가 의협 등 이해단체와 정치적 타협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의약분업의 당위성을 국민에게 설득하려고 (시민단체가) 의료계의 불투명성을 강조했던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결과를 낳았다."(양봉민 서울대 보건대학원 보건학과 교수, 의약분업 당시 경실련을 대표해 참여)

"시민단체가 주도한 의약분업 방안에 정부는 꼼짝달싹 못하게 돼 있었다. 대통령도 '행정부는 뭐하는 곳이냐'고 화를 많이 냈다. 의약분업은 의료정책이 아니라 산업정책이었어야 했다. 의료도 산업인데 의보 수가를 정상화하는 등 시장 왜곡을 바로잡는 대책은 빠진 채, 이상만을 생각하고 부작용이 많더라도 일단 가고 보자는 인식들이 있었다."(김유배 전 청와대 복지노동수석)

"뭔지 잘 몰랐으니 시행한 것"

"DJ 정권은 의약분업이 뭔지 잘 몰랐다. 그러니까 한 것이다. 너무 센 약이 투약돼 소화불량에 걸린 격이다. 특히 의보 수가를 적절히 조정하고 약의 품질을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했으니 이제 추진 동력이 생겼다. 의사·약사의 역할이 확연히 나뉘었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다."(김용익 서울대 의과대학 의료관리학교실 교수,의약분업 당시 인의협·참여연대를 대표해 참여)

"의약분업은 의약분업일 뿐인데, 시민단체들이 의약분업 하나로 의료계 비리 등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려다 의료대란이 났다. 역대 정부는 돈 안 들이고도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국민을 속여왔다. 결국 의약분업이 뭔지 몰랐던 사람들이 의약분업을 했지, 알았다면 못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제 의약분업은 '시행했다'는 것 자체에서 의미를 찾아야 할 것이다."(최선정 전 보건복지부 장관)

"의약분업 명분에 대해서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합의안도 나와 있었다. 그게 내가 받아든 '보따리'였다. 합의는 다 됐고 잔치 날짜도 잡아놓은 일이었다. 정부로서는 보따리를 풀어 밥을 해야 할 입장이었다."(차흥봉 전 보건복지부 장관·현 한림대 교수)

의약분업. 그리고 의료대란.

국민의 정부와 온 나라, 온 국민을 온통 뒤흔들었던 이 일들을 회고하고 평가하는 시각들은 지금도 여전히 이렇게 다르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고만 하면 간단할 것 같은 의약분업은 왜 이리도 복잡한 것일까.

과연 의약분업은 국민의 정부 최대의 실책인가, 역설적으로 최대의 치적(治績)인가.

DJ정권은 의약분업을 '준비된 개혁'으로 추진한 것일까, 그저 좋다니 한 것일까.

아니, 의약분업은 시민단체가 한 것인가, 정부가 한 것인가.

1998년 9월 어느 날.

"金장관. 의사들도 싫다, 약사들도 싫다, 거기다 국민도 불편해진다는데 그런 걸 왜 하려고 하시오."

청와대에서 김모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서 현안보고를 받고 있던 DJ는 툭 질문을 던졌다.

의약분업, 의료보험 통합, 연금실시 확대 등 굵직한 복지부 현안들에 대해 보고하던 金장관은 순간 멈칫했다. 국민의 정부 1백대 과제에도 들어있는 의약분업을 차질없이 추진하는 것을 전제로, 그 과정에서 예상되는 의사·약사들의 반발은 이러이러하며 국민 불편도 어느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점을 보고하던 차에 金대통령이 불쑥 "그런 걸 왜 하느냐"고 묻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金장관은 의약분업의 당위성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왜 해야 하는지, 의약분업을 하면 어떤 효과가 있는지 등등.

그러자 DJ가 다시 金장관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아, 金장관. 내가 하지 말라는 게 아니오. 그냥 물어본거요. 해보시오."

그날 청와대 업무보고를 마치고 복지부로 돌아간 김모임 장관은 최선정 차관을 장관 집무실로 불러 업무보고 결과를 알려주면서 위와 같은 장면을 함께 전했다.

"金장관은 다소 불만스러운 기색이었다."

최선정(뒤에 복지부 장관)은 그날 장관실에서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한다.

"그때는 이미 그해 5월에 구성한 의약분업추진위원회(분추협)에서 의약분업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모델인 이른바 8·24 합의안이 나와 있을 때였다. 복지부는 그 합의안에 따른 홍보전략을 짜는 등 실무준비에 바로 들어가 있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그런 걸 왜 하느냐'고 하니 주무장관으로선 적잖이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DJ가 큰 무게를 두고 그런 질문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8·24 합의가 나올 때까지도 의약분업은 청와대고 당이고 특별한 의지를 갖고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일각에선 의약분업을 두고 자꾸 복잡하게 이야기하는데, 처음부터 무슨 깊은 뜻이나 이념·계산 같은 것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복지부의 단순한 업무 차원이었다."

기록상으로만 보면 DJ가 의약분업에 대해 지시한 것은 98년 4월 초 복지부 첫 업무보고 때다. 당시 주양자 장관의 보고를 받고 "의약분업을 차질 없이 추진하라. 의약품 유통개혁을 통해 나쁜 비리를 근절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朱장관의 업무보고 핵심은 의약분업이 아니었다. 김종대 당시 복지부 기획관리실장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보고의 핵심은 두 가지, '생산적 복지의 구현'과 '찾아가는 복지'였다. 보도자료에도 의약분업은 '중간에 한 줄' 들어갔을 뿐이었다.

후에 8·24 합의안을 뒤집으며 이른바 5·10 합의안을 만들어내는 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김용익의 회고도 최선정과 같다.

"96∼97년 영국 런던대학에서 보건학을 공부하다가 98년 2월에 귀국, 마침 그때 구성된 의료보험통합추진기획단에 1분과 위원장으로 참여할 때까지 나는 DJ 대선 캠프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어떤 형태로든 관여한 적이 없다. 내가 처음으로 국민의 정부 의료정책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 의보통합추진기획단이듯, DJ 정권 초기에 확실히 나온 것은 의보통합 하나뿐이었다. 그때까지는 '의료개혁'하면 '의보통합'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의약분업·의보통합·국민연금확대·기초생활보장제 등 국민의 정부가 복지·의료개혁 분야에서 벌인 굵직한 정책들은 언제 어떻게 생성된 것일까.

의보통합은 초기부터 비중

최선정의 회고. "순전한 DJ 작품은 기초생활보장제 하나다. 복지를 하는 사람이라면 '꿈의 제도'라고 할 만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이 제도는 순전히 DJ의 결단이다. 그러나 의약분업·의보통합·연금확대는 이미 YS 때 시행일정이 다 잡혀있었던 것들이다. 그 시행 시기가 역사적 우연이랄까, 모두 DJ 정권 때였다."

여기서 우리는 잠시, 의약분업·의보통합의 길고 긴 '뿌리'를 파보고 넘어가야 한다. 다만 여기서는 의약분업의 뿌리만을 보자(의보통합의 뿌리는 의보통합을 다룰 때 보기로 하자).

▶의약분업은 수십년간 보건전문가들이라면 누구나 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것. 다만 어떻게 하느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해 실행을 못했다. ▶그 첫 시도는 82년 전두환 정권 시절. 목포 지역에 한정한 시범사업으로. 1년 해보고 나니 '다들 싫어한다'고 나와 결국 실패.

▶이후 12년간 잠잠. 92년 DJ 대선공약으로 등장했으나 누구도 큰 비중 두지 않음.

▶그러다 94년 YS정권 때 엉뚱하게도 이른바 한약분쟁으로 다시 불거짐. 약국에 한약장을 설치하느냐 못하느냐로 시작된 한약분쟁, 약사들이 한약을 취급해도 되느냐는 논쟁을 거쳐 급기야 한의대생 전원 유급 사태로까지.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부산물'로 의약분업 시행시한을 법으로 정함. 한의사들이 한의약 분업을 강력히 주장하자 덩달아 의약분업도 안할 수 없기에. 95년 7월 8일 약사법 부칙을 고치며 2∼4년 뒤인 '97년 7월 8일∼99년 7월 8일'에 한다고 못박음. ▶97년 대선 때 각 당 모두 대선공약으로 제시.

이렇듯 YS 때 깊은 생각없이 해프닝 성으로 정해진 것이 의약분업 시행시한이었다.

그렇더라도 95년 이후 YS정권은 의약분업 준비를 착실히 해왔을까.

다시 최선정의 회고.

"DJ정권이 들어서고 98년 3월 초대 복지부 차관이 됐을 때 이미 큰 보따리 두개가 책상 위에 올라와 있었다. 의보통합과 의약분업이었다. 관계 실국장회의를 해보니 둘다 실질적 준비 작업은 아무 것도 돼있는 게 없었다. 의약분업에 대해서는 (전문·일반)의약품 분류 진행 등 일부 말고는 이해집단 조정 등 큰 일에 거의 손을 안대, 2년여를 허송세월한 셈이었다. 정권인수위도 의약분업엔 큰 관심이 없었다. 뒤에 천지를 뒤엎은 일이 묘하게 시작된 것이다."

이번엔 김유배의 회고.

"사실 의약분업·의보통합은 둘 다 국민의 정부가 덤터기를 쓴 셈이다. DJ 정권 출범 1년 뒤인 99년 3월 복지노동 수석으로 들어갔을 때는 이미 둘 다 어찌해 볼 수 없도록 '결정'돼 있었다. 인수준비위 등 기초 디자인 때부터 경제하는 사람들이 의약분업·의보통합에 참여했더라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98년 8월 첫 분업모델 나와

YS 정권 말기에 의약분업 추진을 위한 작업이 잠시 진행되긴 했다. 97년 들어 의료개혁추진위원회를 만들어 이른바 3단계 분업안(의사의 처방이 있어야만 약국에서 팔 수 있도록 하는 약의 대상을 항생제·스테로이드제제부터 우선 시작해 점차 늘려간다는 것)을 확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큰 그림만 그려놓은 셈이고 약사들의 반발, 재정 투입 문제 등은 여전히 난제로 남아있었다.

어떻든 국민의 정부 출범 후 복지부는 의약분업 추진을 위해 98년 5월 분추협을 구성한다. YS 때 법으로 정한 시한에 따르면 이제 의약분업은 1년2개월 밖에 남지 않은 촉박한 일정이었다.

위원장은 최선정 차관. 위원들엔 의료계·약계·학계는 물론 시민단체·언론계 대표 등이 다 포함됐다. 김용익과 양봉민도 참여했다.

여기서 최초의 의약분업 모델을 내놓은 것이 바로 8월 24일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조용'하던 의약분업을 놓고 뒷날 온 나라를 뒤집은 이른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의약분업이 연기되면서 시민단체가 나서고 정부·당이 무력해진 가운데 의·약계가 충돌·내분을 거듭하며 급기야 의료대란으로 치닫자 궁지에 몰린 정부가 급격한 의보수가 인상으로 봉합을 했고, 이는 다시 의보통합 등과 맞물려 보험재정 파탄으로 이어진 것은 온 국민이 고통 속에 겪은 바 그대로다.

대체 8·24 합의안은 어떤 것이었는가.

시민단체는 왜 어떻게 나서게 되는가.

의사들은 왜 거리로 뛰쳐나갔는가.

정부와 당은 왜 속수무책이었는가.

98년의 8·24합의가 99년의 5·10 합의로 뒤집어지고 2000년 7월 1일 의약분업 실시 후 그해 11월 11일 의약정 타협이 나올 때까지의 과정을 따라가 보면 위의 의문들에 대한 해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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