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양심, 그리고 감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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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선에 나선 한 후보가 지난달 26일 이화여대 구내에서 열린 한 행사장을 찾았다가 학생문화관 앞에서 기자회견 중이던 총학생회 간부와 우연히 마주쳐 얘기를 나눴다. 인터넷 신문에 소개된 대화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런 내용이다.

학생:지금 여기서 양심적 병역 거부 지지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걸 아는가.

후보:군대? 여자는 군대를 안가는데 왜 문제인가. 징병제랑 여성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학생:군대가 있음으로 해서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시에 여성의 성은 남성들에 의해 폭력적으로 다뤄진다. 그래서 여성들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한다.

후보:그러면 전쟁이 문제지 왜 징병제가 문제인가. 여기 서명판에는 '징병제 반대'라고 써 있지 않나.

이 후보는 결국 서명에 동참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전쟁과 군대에 반대하는 여대생들의 주장이 잘 이해되지 않기는 이 후보 뿐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대학 총학생회 사이트는 기자회견 내용을 듣고 화가 난 남자 네티즌들의 집중 공격을 받아 자유게시판이 폐쇄될 정도였다.

지난 1일 국군의 날엔 군에 입대하지 않고 대신 형사처벌을 받겠다고 선언한 대학생 14명이 여의도 국회 주변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권을 인정하라는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국방부 정문 앞에서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권 실현을 바라는 여성주의자' 7명이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천을 몸에 두르고 전쟁에 반대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다 정문을 향해 흰색 페인트를 퍼부었다.

남북 대치 속에 국민 개병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나 대체 복무제 주장에 대한 시선은 차갑다. 여론 조사를 보면 국민 70% 이상이 반대한다. 특히 군대를 경험한 남자들이 더 강한 거부감을 보인다.

그런데도 특정 종교에 국한됐던 이 문제가 최근 몇년 사이 사회·인권단체에 의해 인권 이슈로 제기된데 이어 요즘엔 대학가로 확산돼 가는 양상이다. 입영 또는 집총을 거부하다 감옥에 간 사람이 1만명을 넘었고 현재(8월 말 기준)도 1천4백여명이 군과 일반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지금까지는 이들 모두 종교적 신념을 지킨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었으나 지난해 말 이후 비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거부 선언이 잇따르며 사정이 달라졌다. 불교 신도이자 평화운동가인 오태양(27)씨와 서울대생 나동혁(26)씨를 비롯한 젊은이 4명이 입영 대신 형사처벌을 택했고 대학생·대학원생 17명도 이에 뒤따르기로 공개 선언했다. 이들을 지지하는 26개 시민단체가 연대회의를 구성해 입법운동에 나서고 10만명 서명운동도 진행 중이다.

이들을 고무시킨 것은 지난 1월 서울지법 남부지원이 헌법재판소에 낸 병역법 위헌심판 제청이었다. 헌법에 보장된 사상·양심·종교의 자유가 병역의무와 충돌할 경우 입영 거부자를 처벌하는 규정만 두고 예외적 조치(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것은 기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므로 위헌 소지가 있다는 취지였다. 거부자에 대해 영장이 기각되거나 민간법원의 형량이 징집면제용 최소형으로 낮아지는 추세도 눈에 띄는 변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벽이 높다. 우리 안보 상황이나 국민의 정서적 공감대, 실제 시행에 따른 현실적 문제가 험난하다. 대학가 시위로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병역 의무 기피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고, 형평에도 맞지 않는다. 군대에 가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봉사하겠다는 것을 인정하면 누가 군대에 가려고 하겠는가." 대학생 시위를 접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한 말은 일반인의 정서를 대변한다.

매년 6백명 이상의 젊은이가 종교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감옥으로 가고, 그 숫자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병역을 지킬 수 있는 길은 없을지, 국민적 공론화와 함께 깊이 있는 법적 토론이 이뤄져야 할 시점이 된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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