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필요를 넘어 사랑받는 존재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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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기업, 소위 재벌 때리기가 다시 시작됐다. 대통령이 앞장을 서니 모든 정부 관리가 앞다투어 나서고 있다. 서민 경제가 어렵고, 고용이 늘어나지 않고,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이 모두 재벌 탓이라는 얘기다. 대기업들이 몇 십조원씩 이익을 내지만 돈을 쌓아 두고도 투자를 안 하고, 계열 중소기업을 쥐어짜고, 재벌 계열 캐피털 회사들이 비싼 이자를 받아 서민이 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미국 클린턴 정부 때 노동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 교수가 며칠 전 비슷한 문제를 제기했다. 미국의 500대 기업들이 올해 2분기에 수조 달러의 이익을 내어 기업에는 현금이 쌓였는데 고용은 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이유를 대기업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구조의 문제라고 했다. 기업들이 벌어들인 돈은 미국에서가 아니라 외국에서였다. 따라서 투자 역시 미국 내가 아니라 외국에 치중된다. 기업들이 재투자를 해도 주로 기술혁신 분야로 하기 때문에 고용은 늘지 않는다. 기업은 자신의 회사가치를 지키려 하기 때문에 그 돈으로 자사주를 사들여 주식가치를 높이고, 배당을 늘린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인들이 미국 제품을 많이 구입해야 기업 투자가 미국으로 돌아올 것이지만 그만한 소비가 일어나지 않고 있다고 원인을 분석했다.

이런 미국 기업들과 경쟁해야 하는 우리 대기업들 역시 비슷한 형편일 것이다. 그런데 어떤 정부 인사는 “매출이 12조가 되는 SK텔레콤은 직원이 4500명에 불과한데 이런 기업은 6만 명쯤 고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회사의 경쟁력은 정부가 책임져 줄 것인가? 캐피털 금융의 이자가 높다고 대통령이 호통을 치니 이자율을 낮춘다고 부산하다. 이자율을 낮추면 신용이 부족한 사람에겐 더욱 문턱이 높아질 테니 사금융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투자를 하고 이자율을 낮춘다면 그 나라가 정상인가?

누구를 탓하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것은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는 뜻이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가 높고 경제회복도 빠른데 왜 불만이 높은 것이냐? 그것은 재벌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책임회피에 불과한 말이다. 한나라당의 어떤 정치인은 아예 “우파도 보수 포퓰리즘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누구를 위해서? 정치인들 자신을 위해서인가, 나라를 위해서인가. 나라 경제는 망해도 권력만 잡으면 그만인가? 정말로 제대로 된 지도자들이라면 자신의 처지가 어렵게 되더라도 국민에게 바른 길을 알려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좀 더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세계 1, 2위를 다투는 기업을 가졌다는 것이 꿈같은 얘기가 아닌가. 만일 이 나라에 삼성전자가, 현대자동차가, 포철이 없었다면 우리 경제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이 어려운 시기에 누가 세금을 내어 나라살림을 할 수 있을까.

재벌이 잘못한 것도 감싸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경제도 법치가 되어야 한다. 법치는 불법시위나 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서민경제가 어렵다면 법과 제도로 접근해야 한다. 세금을 어떻게 거두고, 재정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법으로 정해 시행하라는 말이다. 지금 여당은 의석의 반을 훨씬 넘는 170석을 가지고 있다. 그런 수단은 놔두고 대통령의 위세로 해결하려는 방식은 20년 전에나 했던 일이다. 전경련이 “정부와 정치권이 중심을 잡아라”고 한마디 했다가 ‘대기업 편든다’는 대통령 말에 쑥 들어가 버렸다. 대기업들은 “우리 입장과는 관계없는 발언”이라고 발을 빼기에 바쁘다. 마땅히 할 얘기를 해놓고도 변명을 해야 하니 보기에 민망하다. 살아남는 것이 절박한 기업의 입장에서 공연히 권력에 맞서 미움을 살 이유가 없다. 그러니 목소리 큰 사람만 언제나 정의로운 것처럼 보인다.

일부 재벌가의 일탈된 행동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런 점 때문에 기회만 있으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기업이 사회에서 하는 몫만큼 오너나 그 가족들의 윤리와 책임의식도 높아져야 한다. 지금 한국의 재벌들은 사랑을 받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 기업들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것을 현실로 인정하는 것이 용기이고, 포퓰리즘을 이기는 길이다. 대기업들이 오직 필요한 존재에서 사랑까지 받는 존재가 되는 그날, 우리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나라가 될 것이다.

문창극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