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기…유머… 이보다 더 튈수는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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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도발·엽기·악취미 따위의 표현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감독이 어디 또 있을까. 개인적으로 볼 때 영락없이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하이 힐''내 어머니의 모든 것'의 감독)의 적자로 비치는, 1990년대 프랑스가 낳은 '괴짜 영화 악동' 프랑수아 오종(35) 말이다.

17일까지 서울 하이퍼텍 나다(02-3672-0181)에서 열리는 '프랑수아 오종 영화제'는 평소 '튀는' 영화를 즐기는 팬들에게는 여간 반갑지 않을 깜짝 선물이다.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가장 큰 화제를 불러모은 최신작 '여덟명의 여인들'(2002년)이 빠진 게 아쉽긴 하지만.

오종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분들에게 제대로 즐기는 방법 몇 가지를 귀띔해주고 싶다. 가능하면 대표작 '서머 드레스'(95년)를 포함한 5편의 단편 모음부터 보라. 그것만으로도 버거우면서도 매혹적인 오종의 세계를 일별할 수 있을 테니까. 동성애와 양성을 자유롭게 오가는 반제도적인 태도, 도발적인 성적 상상력과 인간 관계를 향한 한없이 발칙한 시선, 충격과 유머가 병존하는 기발함, 드러냄과 감춤을 기교 높게 병치하는 거침없는 스타일, 그리고 예측불허의 극적 전개에 이르기까지.

다음으론 발표 순서대로 볼 것을 권한다. 출세작인 52분짜리 중편 '바다를 보라'(97년)부터. 앨프리드 히치콕의 수준급 서스펜스에서 존 워터스('핑크 플라멩고')의 저급한 악취미까지 두루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역겹기 짝이 없는 일부 장면이나 선(善)을 조롱하는 듯한 루이스 브뉘엘('부르주아의 은밀한 욕망')과 로버트 앨트먼('숏컷') 식의 냉소적 결말에는 적잖이 충격을 받겠지만, 동시에 그 못지않은 강렬한 임팩트를 느낄 게 틀림없다.

98년 칸 영화제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장편 데뷔작 '시트콤'(98년)은 오종의 도발성이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문제작이다.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지독한 '콩가루 가족 이야기'(?)다. 이른바 가족 이데올로기나 가정의 가치는 완전히 붕괴·해체돼 버린다. 섬뜩할 정도로. 최근 개봉한 '로열 테넨바움'은 물론 '아메리칸 뷰티''아담스 패밀리'등 기존의 괴짜 가족 이야기는 한마디로 '새발의 피'다.

99년작 '크리미널 러버'는 동화 '핸젤과 그레텔'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엽기·잔혹 버전이라 할 만하다. '내추럴 본 킬러''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등을 연상시키는 이 작품은 죄의식 없이 저지르는 살인에서 시작해 시체 은폐와 납치·강간·카니벌리즘(식인주의)·동성애에 이르기까지 온갖 자극적 이슈들을 날것 그대로 제시한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오종이 악동으로서 악명을 굳히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970년대 '뉴 저먼시네마'의 거장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가 열아홉살 때 쓴 동명의 희곡을 바탕으로 만든 작품 '워터 드롭스 온 버닝 록'(2000년)은 오종의 인간 관계에 대한 통찰뿐 아니라 그의 시공 감각이나 연기 및 대사 연출력이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오종은 성적(性的) 관계라는 것이 실제론 권력 투쟁의 장일 수 있다는 사실을 더할 나위 없이 효과적으로 웅변하고 있다.

프랑스의 한 평자가 "2000년에 나온 가장 아름다운 프랑스 영화"라고 극찬한 근작 '사랑의 추억'은 감독의 인생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얼마나 성숙해 있는지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퍽 감성적이지만 결코 감상으로 치닫는 법이 없는 이 걸작에 이르면 오종의 도발이 그저 튀기 위한 맹목적 시도가 아님을 문득 깨닫게 될 것이다.

여주인공 마리 역을 환상적으로 열연한 50대 중반의 샬로트 램플링의 연기만으로도 커다란 감동을 받게 될 것이고, 이번 영화제의 맛을 만끽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법은 따라서 이 영화에서 출발해 거꾸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찬일·영화평론가

chanilj@hanaf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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