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추적 못하나 피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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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주말 막내린 국회 국정감사는 '4억달러 대북 비밀 지원' 의혹을 풀 결정적인 실마리들을 많이 제공했다. 재경위의 산업은행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한 엄낙용 전 산은 총재는 "현대상선에 산은이 4천억원을 대출하는 과정에 청와대가 개입했다"는 요지의 증언을 했다. 그는 또 "그 돈은 정부가 쓴 것이지, 현대상선이 쓴 게 아니다"는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의 말을 믿는다고 밝혀 북한에 넘어갔을 것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내비쳤다.

그러나 한광옥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기호 당시 경제수석·이근영 당시 산은 총재(현 금융감독위원장)등 당사자들은 嚴씨의 증언을 극구 부인하고 있다.

말이 다르면 조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진실이 밝혀진다. 그런데도 진실을 밝히는 수단인 계좌추적을 포함한 특별 조사에 대해선 정부 어느 부처, 누구 한 명 의욕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부의 태도에 더 의혹이 가는 상황이다.

◇더 불거진 의혹들=嚴전총재의 국회 증언은 ▶청와대가 지시해 빌려주지 않을 수 없었으며▶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으로부터 '산은에서 빌린 돈을 쓰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통상적인 대출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는 또 ▶대북 문제를 담당하는 국정원 3차장을 만났고▶서해교전 소식을 접한 뒤 대북 지원금이 북한군 전력 강화에 쓰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특히 인간 관계상 쉽게 거명하기 어려운 한광옥 전 실장·이근영 위원장 등의 실명을 '청와대 개입'의 근거로 공개했다. 비장한 각오와 확신이 없이는 어려운 일이라는 지적이다. 그는 현대 문제와 관련한 청와대 대책회의 내용을 묻는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정말 있었던 대로 얘기할까요"라고 말해 못다한 얘기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했다.

◇발뺌만 하는 정부=청와대 개입 여부는 현대상선 대출이 경제논리에 의한 산은 자체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라 대북 지원 등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는지를 가리는 데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이를 부인, 더 이상 '말'만으로는 실체 규명이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이근영 위원장은 산은이 현대상선에 문제의 4천억원을 빌려 줄 당시 산은 총재로 있었다. 따라서 진실 규명의 열쇠를 쥐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대북 문제는 아는 바 없다" "嚴전총재가 뭔가 착각을 한 것 같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특히 嚴전총재는 청와대 개입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 대질 신문에 응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으나 李위원장은 응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의혹을 밝힐 책임이 있는 금감위의 수장인데도 李위원장이 계속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한 진실을 규명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불가피한 계좌추적=의혹을 해소할 길은 결국 산은이 현대상선에 대출한 4천억원이 어떻게 쓰였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2000년 6월 7일 산은 3개 지점에서 인출된 7장의 자기앞수표가 누구의 손을 거쳐 어디로 갔는지를 파악하면 돼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재경부·공정거래위·금감위는 일제히 '계좌추적 불가'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치권도 정부 부처에만 계좌추적을 요구할 뿐 정작 '검찰에 고발하면 계좌추적이 가능하다'는 사실 등은 외면하고 있다. 오는 14일부터 산은에 대한 감사에 착수하는 감사원도 계좌추적에 나설지에 대해서는 확실치 않은 상태다.

정부는 이 대출금이 현대상선의 유동성 위기 방지 용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내부의 문제이자, 산은 자체 판단으로 대출해준 것이란 주장이다. 그런데 이처럼 현대 내부의 문제라면 더욱이 계좌추적에 나설 법적 타당성이 있다.

현대상선은 산은에서 빌린 돈 가운데 1천억원을 교보증권에 맡겨 교보증권이 이 돈으로 현대건설 기업어음(CP)을 사들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사실이라면 부당 내부거래(계열사 지원)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공정거래법상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할 근거가 된다. 따라서 '현대 내부의 문제'라고 주장하면서도 '계좌추적 등 조사는 할 수 없다'는 정부의 주장은 자가당착이라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더 이상 질질 끌지 않고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라도 계좌추적은 불가피하며 정부 스스로 즉각 나서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허귀식 기자

ksline@joongang.co.kr

대북지원설 관련 일지

▶2002년 3월 25일

미국 의회조사국(CRS) 한·미 관계 보고서 "비공식 대북 송금액 4억달러"

▶9월 25일

①엄호성 의원(한나라당) 4천9백억원 대북 비밀 지원 의혹 제기

②엄낙용 전 산업은행 총재, "김충식 전 현대상선 사장이 '대출금을 정부가 썼으니 정부가 갚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증언

▶9월 26일

①嚴의원, "4천9백억원 북한 아태평화위 계좌에 입금"

②감사원 산은 감사 착수 방침 발표

▶9월 27일

한나라당, "산은 3개 지점에서 4천억원을 수표 3장으로 인출해 국정원에 전달"주장

▶9월 29일

한나라당, "4천억원 통째로 장부 누락"주장

▶9월 30일

산은,"현대상선 4천억원 즉시 인출"해명

▶10월 2일

이종남 감사원장, "14일부터 산업은행 감사하겠다"고 발표

▶10월 4일

①산은, "4천억원을 수표 7장으로 나눠 인출"

②嚴전총재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한광옥 비서실장이 전화해 어쩔 수 없이 대출했다'고 했다"

③이근영 금감위원장·한광옥 민주당 최고위원 등 嚴전총재 발언 전면 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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